아주 오랜 전부터 연기자는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인기 계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코 배우들의 일에는 참견하지 말라. 그들은 총애받는 계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흥을 돋우는, 즐거움을 주는 무리들임으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을 아껴주며 보호해 준다는 것을 잊지 말라.”(세르반테스) 이것은 약 400년 전에 나온 말이다.
세익스피어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필자는 연극에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희곡을 쓰기도 했다. 그는 또한 연극 배우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위의 인용에서 약간의 비판은 있지만, 대중의 사랑과 인기 속에서 살아가는 연기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모든 사람들의 아낌”을 받는 연기자가 오늘날은 흔히 연예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연예인과 만나게 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텔레비젼 매체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기계문명의 고도한 발달로 말미암아 실로 다양한 대중매체들이 활개를 치며 때로는 우리를 현혹시키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텔레비젼이다. 모든 가정 안방의 주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텔레비젼은 우리와 일상을 함께 하는 생활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 속에서는 우리 삶의 애환이 그대로 뒤엉키면서 거대한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간다. 고달프거나 서러움에 차 있을 때에도 일상인들은 텔레비젼 앞에 앉아 그것을 소화하고 승화시켜 나아간다. 힘겨운 일터에서 녹슨 심신도 여기에서 휴식을 얻는 동안 부드러운 해면처럼 순화된다. 모든 권태와 초조가 사라지는 소박한 행복을 맛보는 것도 이때이다.
만일 오늘의 가정에 텔레비젼이 없다면, 체면이니 의무니 하는 따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윤활유가 없어진 낡은 기계처럼 삐꺽거리며 살아가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참으로 텔레비젼은 인생의 항해를 추진하도록 힘을 준다. 우리가 아무리 실무에 충실한다 할지라도 심신의 피로나 우울이 마음속에 자리잡은 것을 막아주는 장치가 없다면 역시 우리의 삶은 괴롭고 불행해지게 될 것이다.
텔레비젼의 숱한 드라마와 오락 프로는 우리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한류’라는 말이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유행하고 있다.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심으면서 그에 따르는 여러 가지 파급효과를 얻고 있는 ‘한류’의 대부분도 바로 텔레비젼이 제작하였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텔레비젼 역시 커다란 역기능을 안고 있다.
한 때 “바보상자”라는 말이 유행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인간을 바보로 만들려고 의도된 것은 아니다.
텔레비젼을 도매상인으로 비유한다면, 그가 공급하는 정보나 오락물은 상품이요 시청자는 수요자라 할 것이다. 만약 불량상품이 공급되어 잘 팔린다면 수요자는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오히려 수요자는 텔레비젼으로 하여금 시청률이라는 허황한 흉계를 꾸미도록 조장하거나 동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락과는 동떨어진 프로들이 범람한다.
오락은 꽃이요, 건전한 정신은 뿌리이다. 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려면 먼저 튼튼한 뿌리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물질 만능의 풍조는 찰나적, 피부적, 엽기적인 쾌락에만 탐익하고, 우리는 그 풍조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최근에 텔레비전 화면에 완전 나체로 쇼를 벌이는 장면이 방영되어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결국 정신을 벗어난 쾌락만을 따르는 풍조가 빚어낸 것 같아서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김 영 환<전 오현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