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태종16년(1416)에 고려 말(末) 동도(동아막:성산읍 수산리)를 정의현, 서도(서아막:한경면 고산리, 대정읍 신도리)를 대정현으로 개편하고 제주목과 함께 3읍으로 행정구획을 확정하여 목마장을 소속시켜 마정(馬政)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였고 세종11년(1429)에 목마장을 한라산중턱(해발 400~600m)으로 옮겨 10개의 마장(馬場)인 목구(牧區)로 나누어 제주목의 판관은 1소장~6소장, 정의현감은 9~10소장, 대정현감은 7~8소장의 감목관을 겸임하여 관리하였다.
효종4년(1653) 이원진(李元鎭)의 耽羅志에는 제주목은 7소(所)-38둔자장(屯字場), 정의현 3소(所)-17둔자장(屯字場), 대정현 1소(所)-3둔자장(屯字場)인 11소(所) 58자장(字場)으로 개편 정비하였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는 숙종 28년(1702년) 제주도의 지리, 풍속, 관민(官民), 방어시설 등을 채색그림으로 묘사한 화첩을 말한다.
제작자는 당시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형상으로, 그는 직접 제주 전역을 순시하면서 관찰한 그대로를 화공 김 남길에게 41면의 화폭에 그리게 하고 그림마다 간단한 주석과 통계수치를 덧붙인 뒤 2면의 서문(序文)을 첨가하여 순력도를 완성하였다.
이 화첩에는 유독 많은 말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말 생산이 당시 제주의 기간산업이었고, 공무수행을 비롯한 중요한 사회활동들이 제주마와 더불어 이루어졌음을 증명하고 있다.
한라장촉에는 소(所) 5곳(二所, 大二所, 大三所, 牧一所, 牧二所)과 목장(牧場) 5곳(別牧場, 左場, 山場, 針場, 元屯場) 및 자목장(字牧場) 8곳(黃字,宇字, 別玄字 日字, 黃字, 辰字, 玄字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숙종30년(1704) 이형상목사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는 제주목마장이 10소 63자장으로 조직 개편되었으나 마필수가 13~43匹인 字場이 많았다고 한다.
그해 송 정규 목사의 건의로 부실한 목마장을 우수한 목마장과 합쳐서 다시 10소장으로 정비하여 운영되었다.
1800년부터 세도정치의 파탄, 공마진상의 부담, 목마장지대의 농경지로 무단 개간 등으로 목장의 협소, 일제침략으로 순종4년(1910) 제주목마장은 일본의 강점(1910~1944년)에 의하여 군유지·사유지·마을공동목장으로 등재되었고 광복 후 마을공동목장(중산간지대)과 개인 기업목장에서 제주마보다 한우와 육우를 더 많이 사육하게 되었다.
1.소장과 별방조점(別防操點)
① 위치
제주도 동쪽에 있는 구좌읍에 속하며 해발 200~450m의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룬 오름으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은 산마장(상장)과 경계인 성불오름 북쪽으로는 상잣이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대천목장 경계).
2소장과의 경계인 부소오름, 검은오름, 웃바매기오름과 알바매기오름 동쪽으로는 영조 4년 (1780) 김영수 목사때 936步 쌓은 간장(間墻)은 지금도 그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10소장과의 경계인 백약이오름, 동쪽으로 동검은오름, 높은오름으로 연결된 목장이다. 백약이오름 북쪽의 잣성(100m는 원형이고 길게 동검은오름까지 흔적을 볼 수 있음)은 제주목과 정의현의 경계이며 지금의 행정경계선(남제주군과 북제주군)과 일치한다.
그리고 천미천 중류에 해당하는 줄기가 부소오름 기슭을 지나 대천동을 돌아 장기동에서 성불오름 동쪽을 통과 하면서 10소장 서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곳은 고려 충렬왕2년(1276)에 몽골마 160필과 마(馬)전문가들이 탐라국에 들어와 제주도목마장의 기원이 된 동아막(牧區)지대인 수산평이 높은오름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져 있고 고려 말 제주도8개 목장에 속한 것으로 추정되며 숙종 28년(1702) 이형상 목사 때 한라장촉과 남환박물에 별방소 제1소와 별목장의 천자(天字)목장으로 제주목에 소속된 목장이다.
② 목장실태
정조때의 제주읍지, 철종때 탐라고사의 목장도형 등에 의하면 마 553~946필, 마감·반직감·군두·목자 27~64명, 수처(못) 4곳, 국가에 진상하는 흑우를 많이 기른 황태장(牛목장)이 있었는데, 소가 163~620首, 우감, 군목, 목자 12~40명이 배치된 것은 말과 소의 사육두수에 따른 변화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산마장으로 통하는 문(門)인 빌어냇도(非乙於川梁)가 기록되어 있다.
별방조점은 제주도 목마장 10소장 중 1소장에 해당하는 곳으로 숙종28년(1702) 10월 30일 제주목사 이형상이 조방장 김여강, 성정군 423명, 말 946필, 흑우 247수, 목자와 보인 187명, 곡식 2860여석(石)이 보관된 것을 점검한 그림이다. 숙종30년 이형상이 쓴 남환박물(南宦搏物)에서 보면 별방소(방호소)제1소가 자(字)장이 7개소인 천(天), 지(地), 현(玄), 황(黃), 우(宇), 주(宙), 출(出)과 별목장인 천(天), 지(地) 자(字)목장에서 사육 중인 말들을 한곳(黃字場의 屯馬)으로 몰아오는 그림이고 별방시사(別防試射)는 11월1일에 활 잘 쏘는 사람을 뽑는 그림인 별방진성 안에 원장(圓場)과 사장(蛇場)이 설치되어 제주마와 흑우를 점검하였다.
일본강점기때인 1933년에는 군수물자조달을 위해 제주축산개발계획에 따라 마을공동목장을 설치하여 말과 소 사육을 장려하였다.
광복이후 1956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재단(韓美財團) 후원으로 제주에 국립목장 건설을 지시하였고 1957년 3월 28일 한미재단 이사장 밴플리트 대장 등이 구좌읍 송당리를 국립목장지로 3백만 평을 선정하여 목장 내에 축사와 창고, 대통령 특호 관사, 귀빈용 관사 및 자가발전시설 60KW, 전화시설, 저수시설 등 공사를 시작하였다.
1957년 10월말에 준공하였으며 1957년 8월 육우 부라만(Brahman)를 밴프리트장군의 고향 플로리다 주에서 166두를 싣고 35일 만에 부산항에 입항하여 LST함에 옮겨 성산포항에 도착하였다. 9월에 면양과 산양 148두, 12월에는 소 200두가 들어 왔으며 그 품종은 대부분이 부라만, 헤리포드(Hereford), 산타거트루디스(Santo Gertrudis), 쇼톤(Shorthorn) 등이 도입되었다.
이때에 도입한 소에서 인수공통전염병(zoonosis)인 브르셀라(Brucella aborus)병이 발병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들 중 브르셀라(Brucella aborus)병에 감염된 소(牛)도 도입되어 제주교잡육우에 큰 피해를 주었으나 지속적으로 검사하고 양성우로 판명되면 살처분(Test-Slaughter)방식의 방역을 실시하여 현재는 근절되었다.
1962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아무리 자연조건이 좋아도 인위적 노력이 80%를 차지하지 못하면 어떠한 사업도 실패하기 마련이며, 목장의 실패원인을 이전 정부의 감독 소홀과 연구부족, 운영시책 미흡, 관리원들이 운영의식 부재로 판단하여 불하방침을 정하며 1963년 5월에 삼호그룹이 국립목장을 인수하여 송당목장이라 명명하였다.
현재 성불오름쪽 송당목장은 미국산 pony 10필, Thoroughbred종 51필과 소 600두를 사육하고 있으며, 아부오름과 백약이오름 북쪽에 위치한 건영목장, 송당승마장에는 제주마와 교잡마 100두를 사육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세화공동목장, 하도공동목장 등 10여개가 있다.
(다음호에 계속)
장 덕 지 교수
제주산업정보대학 관광생명자원과
(제주마문화연구소장·제주도문화재위원·제주마주협회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