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가’하면 ‘자유’ 연상할 듯
창조적으로 자기 작품 하니 당연
열정·양심으로 창작해야
어떻게든 목적지에 빠르게
떠나온 일상과 장소만 다를 뿐
과정 생략된 ‘내비 사회’ 유감
제주에 다녀온 지 보름쯤 지났다. 5박6일.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일정이었다. 오가는 날 빼면 고작 나흘인데, 먼 길을 다녔다. 중문에 짐 풀고는 제주시와 구좌·성산·애월·한림을 넘나들었다. 오가는 길은 질서 없이 중구난방이었다. 구좌 갔다 애월 들러 다시 건입동 찍고는 중문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길눈 어둔 ‘원조 길치’가 감당해야할 몫이었다.
그나마 형편 좀 나아진 건 내비게이션 덕분이다. 일단 수첩에 빼곡하게 적은 주소를 기계에 입력했다. 이후에는 ‘미스 내비’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됐다. 왼쪽으로 가라면 갔고, 유턴하라면 했다. 덕분에 섬에서 길 잃은 적이 없다.
제주에서 돌아와 여정을 되돌아 봤다. 디지털 지도를 열고 방문지를 지도 위에 표시했다. 이동한 경로대로 연결해보니 뒤숭숭했다. 전날 지나간 곳을 이튿날 들른 건 약과다. 몇 차례 지났음에도 목적지에 눈 어두워 건너 뛴 곳이 허다하다. 지나는 길에 들러 얼굴이라도 봤으면 좋았을 후배, 안부라도 묻고 싶던 옛 동료 등의 얼굴이 줄줄이 떠올랐다. 때늦은 후회인데, 나의 무심함과 내비게이션에 완전히 기대버린 탓이다.
목적지를 향한 여정 중 아름다운 풍광을 놓친 것도 아쉽다. 기계는 언제나 목적지를 향해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길, 그래서 가장 빨리 다다를 수 있는 길을 짚어줬다. 탁월한 선택이었지만 돌아보니 헛헛하다. 뭔가 놓친 건 아닌가 싶다. 영화 ‘곡성’ 명대사처럼 “뭣이 중한 지” 잊고 지낸 것만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의문은 확신으로 또렷해졌다. 속도와 효율을 앞세워 정작 ‘중한 것’들은 뒤로 밀린 거다. 내비는 제주라는 섬 전체를 속도와 거리로만 측량될 공간으로 볼뿐이다. 출발점과 목적지 사이의 장소들은 고려할 게 못 된다. 각각의 장소가 맺는 관계성, 저마다 가진 의미나 가치는 제거된다.
목적지에 이르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과정이야 어떻든 목적지에, 그것도 가장 빠르게 이르면 되는 것이다. 이런 내비게이션의 속성은 사뭇 도시인의 삶을 닮았다. 수단 방법 아랑곳없이 저마다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우리네 삶 말이다.
읽고 쓰는 것이 업인 장석주는 “산다는 것은 곧 장소를 경험하는 것”이라 했다. 내가 살아 움직이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내 본연의 정체성이 규정된다는 뜻이겠다. 소설가 김훈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지도를 보는 자는 맥락을 읽는 자”라고 했으니 말이다. 사람 사는 건 허다한 사람과 장소 사이에서 섞이고 비벼지는 그 무엇이라는 것. 그러니 과정에서의 관계와 맥락이 중요한 것이겠다.
‘지도를 본다’는 것과 ‘내비게이션을 켠다’는 것은 이 점에서 크게 다르다. 기계 속의 ‘그 곳’은 한 점 개별체일 뿐이다. 하지만 지도 속의 ‘장소’는 주변에 거느리고 있는 또 다른 장소들과의 관계 속에서 풍성한 가치를 갖는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낯 선 장소의 가치를 경험하는 것이어서 이번 제주 여정의 아쉬움이 큰 거다. 좋은 이들을 만났지만 좋은 장소를 누리지 못했다. 반쪽짜리 여정인 셈인데, 이게 어디 나만의 얘기일까 싶다.
따져보면 제주야 굳이 내비게이션 아니어도 길 잃을 걱정 없다. 설사 길 놓친들 걱정할 것 없는 섬이다.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해도 그게 더 좋을 수도 있다. 가고자 하는 ‘그 곳’보다 더 나은, 뜻밖의 풍경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제주 곳곳 어디 간들 ‘그 곳’ 못지않다.
그런데도 모두들 내비게이션을 장착하고는 출발지-목적지를 단숨에 오간다. 그 과정에 놓인 작고 소중한 풍경은 간단하게 생략된다. 과정이야 어떻든 목적지에만 이르면 된다. 그것도 되도록 빨리!
이쯤 되면 벗어나자고 떠난 일상과 벗어나 만난 곳에서의 여정이 그리 다를 바 없는 셈이다. 몸만 장소만 옮겼을 뿐 의식은 도시에서의 일상 그대로다. 아무래도 오늘날 우리네 삶은 기계문명에 포획돼 정작 ‘중한 것’은 놓치고 사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오로지 ‘목적지’만을 향해 내달린다는 점에서 내비게이션 사회라 해도 무리는 아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