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폰 등 세상 많은 변화
여성에 대한 인식도 크게 개선
원로 활약도 사회 변화 덕분
예능 프로그램 단순한 재미 아니
현실과 동떨어진 삶 세뇌·강요
어느새 삶 기준 돼 시청자 현혹
세상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국제전화는 고사하고 시외전화를 걸기위해 전화국에서 줄을 서야 했던 게 불과 몇 십년 전인데 이제는 인터넷을 통하면 지구촌 어디든 공짜 문자는 물론 통화도 가능해졌다. 있는 집 마당에 모여 보던 ‘직직거리던’ 조그만 흑백 TV가 이제는 스마트폰에 담겨 선명한 컬러 화면과 함께 우리 손안으로 들어왔다.
기계뿐만 아니라 성에 대한 인식도 많이 문명화됐다. 1980년대는 물론 1990년대까지도 남녀 차별이 심했다. 여자는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책임과 의무가 더 큰 육아와 가사 노동은 진정한 보람과 가치 이전에 종종 정체모를 억울한 마음을 품게 하곤 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교육과 함께 여성들이 사회참여 차원을 넘어 남성과의 경쟁을 딛고 ‘영역’을 확장해 나가면서 이제는 ‘양성평등’은 사회 보편적 가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요즘 60~70대 장년들은 자신에게 의욕과 활기를 강요하며 산다고 한다. “얼굴은 동안인데다 기력도 괜찮고 많은 경험에 머리 회전도 여전하니 아직은 쓸 만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라고 되뇌면서. 비슷한 연배의 필자도 자주 이런 의지와 확신을 스스로에게 종용하고 세뇌시켜가며 살고 있다.
이를 행동하는 ‘동지’들도 있다. 과거의 스타들이 각종 TV 프로그램으로 돌아와 노익장을 과시하며 다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예전 같으면 ‘원로’였으나 지금 시대에선 당당한 ‘현역’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또한 나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 덕분이다.
시대적 변화를 가장 확실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매체는 TV인 것 같다. 현재 종편은 물론 지상파에도 아빠의 육아, 남자의 요리, 남자의 화장, 내조 남편, 엄마 가장, 여자 리더, 여자 투사 등 달라진 사회상에 대한 프로그램들이 많아졌고 인기 또한 매우 높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과 위치가 뒤바뀌어도 여유 있고 행복하게 살만한 세상이 그려진다. 나아가 이것 또한 당연한 시대적 가치임이 우리의 눈과 귀를 통해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수많은 미디어 매체들은 앞 다투어 이런 세상을 보여주며 우릴 세뇌시키고 유혹한다.
예능 육아프로그램을 바쁜 중에도 챙겨보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회를 거듭하면서 의문이 생겼다. “어떻게 저 아이들은, 저 부모들은 한 결 같이 저렇게 착하고 유능할까…. 나는 겨우 한 아이를 키우면서도 많이 힘들어 했는데. 하지만 무슨 뚱딴지같은 시비인가 싶어 요즘 아이들이 진화를 했나보다” 하면서 넘어갔다.
그런데 얼마 전 생각이 반짝해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젊은이들의 모임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에서다. 이들은 동년배 평균치 이상의 혜택을 받고 자라 나름 괜찮은 직장을 가진, 대부분 조기유학을 경험한 청년 그룹이었다.
이들은 “요즘 국내 TV 예능 프로그램의 흐름과 이에 열광하는 시청자, 특히 또래 젊은이들을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TV가 현실은 도외시한 채 이상적인 남자가 되고 여유가 있어야 결혼도 하고 행복해질 것처럼 그리면서 그렇게 사는 게 목표이자 진정한 가치인양 세뇌하는 것 같아 한국에서 사는 것이 도리어 두렵다는 것이었다.
예능 프로그램은 그들에겐 단순한 재미와 심심풀이가 아니었다. 어느새 삶의 한 기준이 되어 시청자들의 목표와 가치를 흔들며 현혹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아직 현지 적응이 안 된 그들만의 불편함으로 돌리기엔 너무나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우리의 인식도 서서히 ‘잘못’ 젖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종류의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가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 지, 냉철한 시대정신과 문화인식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은 언제쯤 보게 될는지 많은 근심을 일깨워주는 계기였다.
눈에 빤히 보이지만, 쉽사리 손에 잡히는 듯하지만, 여전히 만만치 않은 게 세상임을 잠시 잊을 뻔 했다. 그리고 어쩌다 운이 좋아 유학을 해 철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청년들로부터 냉철한 지혜와 살아있는 의식을 확인, 덩달아 정신이 맑아진 듯 상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