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남겨진 그의 발자취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국 곳곳에서는 그의 일생을 기억하고 회고하기 위한 기념 전시·공연 등이 열리고 있다. 짧지만 강렬한 삶을 살았던 이중섭은 제주·대구·통영·부산·서울 등 전국 곳곳에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사후 미술시장에서는 그를 ‘비운의 화가’로 부르다 보니 작품에 대한 예술사적인 의의와 역량에 대한 평가는 진척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중섭 작품의 예술적 복원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편집자주>
대향(大鄕) 이중섭(1916~1956). ‘국민화가’라 부르지만 우리는 아직도 화가 이중섭에 대해 모른다. 짧다면 짧은 41년의 삶, 우리는 그를 불운한 시대에 예술가의 생애를 살다간 천재화가라 부르고 있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이중섭은 청년기에 일본 동경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일본 여인 마사코와 결혼한다. 하지만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아내와 두 아이를 일본으로 보낸 후 정신 이상을 겪은 그는 홀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고난의 연속에도 이중섭은 본인의 회화 충동을 담배 은박지에까지 표현하며 끊임없이 예술혼을 불살랐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작품과 함께 극적인 삶을 기억하기 위한 현대인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그의 걸음이 닿았던 각 지역에서는 아직도 이중섭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제주 서귀포시에는 이중섭이 머물던 거리와 그의 예술혼을 기념하기 위해 이중섭 미술관이 개관했고,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는 그의 묘소가 남아있다. 그가 두 번의 피난 생활을 하며 ‘범일동 풍경’을 그린 부산 범일동에도 이중섭 거리와 이중섭 전망대 등이 있다.
이중섭이 가장 오랜 기간 기거하며 대표 유화 작품 ‘흰소’, ‘달과 까마귀’ 등 그렸던 통영에도 이중섭 거주지 인근이 역사문화기행코스로 만들어 졌다.
방송 드라마 등을 통해 이중섭의 주된 작업의 산실이 제주 서귀포였던 것으로 잘못 알려지며 서귀포가 집중 조명 받기도 했었지만, 전국 곳곳에서는 그를 기억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는 중이다. 아마도 황폐한 시절을 견뎌낸 순수한 예술가의 일생을 한 고장에서만 애지중지하기에는 이중섭의 예술성이 너무도 빛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서귀포시 이중섭 미술관 전은자 큐레이터는 “이중섭이 통영·부산·제주 등에서 지낸 시간이 길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각 지자체가 서로 이중섭의 예술적 고향임을 자처하는 것은 화가에 대한 애정이고 관심이라 볼 수 있다”고 했다.
전 규레이터는 “전국 각지에서 이중섭과 관련해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관심을 이어가면 관람객들도 화가 이중섭의 삶 이외의 것도 알고 싶어 할 것”이라며 “100주년을 기점으로 그의 삶 이야기 외에 작품에 대한 연구도 진척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