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없는 문화유산은 폐허에 자리하는 박제”
“감동 없는 문화유산은 폐허에 자리하는 박제”
  • 김은석
  • 승인 2016.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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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보존 이유는 집단 정체성 
지석묘정비계획 ‘역작’ 불구 아쉬움
보존방안 안내판 정비 등이 고작

읽고 느낄 수 있는 환경조성 필요
무엇이 있느냐의 문제 아니
어떤 모습으로 다가서는가 중요

제주시 ‘지석묘 종합 정비 기본계획’이 나왔다. 제주시의 지석묘 분포 실태뿐만 아니라 활용계획까지 집대성한 500쪽 넘는 분량의 보기 드문 ‘역작’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왜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정비하려는 것일까?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리투스(Heraclitus)는 “만물은 유전하기 때문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다. 불과 몇 십 년 전의 집도 살아남기 어려운 한국의 개발 신드롬 속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과거를 잃어버리는 것은 집단 기억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집단 정체성의 소실이다. 그래서 지켜 나가려는 것이 문화유산이다.

유적과 유물은 물질을 매개로 존재한다. 외형만 놓고 본다면 경복궁과 지석묘는 그저 멋진 기와집이나 커다란 돌덩이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과거인이 고민하고 추구하고자 했던 정신의 결정체로 본다면 거기에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그 기와집과 돌덩이에서 조선왕조의 성리학적 통치 질서나, 거석문화의 세계를 읽어낼 수 있다면 기와집과 돌덩이의 물질적 의미는 달라진다.

유적·유물이란 공간과 형태로 표현해 낸 이 땅에 살다간 선조들의 정신이다. 따라서 이를 지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외관이 아니라 선조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깨달음이며, 그들이 이루어낸 지적 행위들이다. 또한 그 기와집과 돌덩이에 담긴 정신을 깨닫는다는 것은 우리의 실존적 가치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석묘 종합 정비 기본계획’ 가운데 당연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보존방안이다. 훌륭한 보고서임에도 아쉬움이 있다. 500쪽 넘는 방대한 계획서에서 보존방안은 각 지석묘에 서너 줄로 제시된 이정표와 안내판 정비 내용이다.

물론 흉한 몰골을 드러낸 지금의 안내판은 현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눈 앞의 것만을 다루는 것은 종합 정비 기본계획의 취지와는 거리가 있다고 본다. 계획서에는 지석묘의 물적 가치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존적 가치에 대한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정신적 가치까지 보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정표와 안내판 정비는 5년, 10년 뒤 또 훼손되고 낡아진 상태로 남게 된다. 그러면 결국 지금과 달라질게 없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단지 ‘그 곳에’ 있을 따름이지 지켜야 할 문화의 실체로 다가오지 않는다.

재차 강조하지만 제주 지석묘 보존에 필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라 거기에 담긴 제주 역사의 의미이다. 유적 앞에서 과거의 의미를 그려볼 수 있는 상상이야말로 문화유산을 접하는 우리들에게 부여된 최고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석묘의 실존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방안은 우선 유물을 읽고 느낄 수 있게 하는 환경 조성이다. 보존이란 과거의 상태 그대로 변치 않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구조를 잃지 않으면서 시대적 변화가 중첩되어 쌓이는 과정을 의미한다,

오늘날 도시개발로 지석묘 주변의 생태학적 환경은 옛 모습이 아니다. 따라서 지석묘를 지금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단순한 돌덩이로 남겨둘 것이 아니라 생명력을 지닌 ‘지석묘공원’같은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이정표와 안내문을 어떻게 만들고, 관광자원화를 위한 해설사 양성교육 등의 효율적 방안 탐색은 그 다음 문제이다.

문화유산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서는 가에 있다. 지금처럼 쓰레기더미 속에 내버려진 상태에서 안내판 정비 정도로는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이 생길 까닭이 없다.

감동에 뿌리를 두지 않는 문화유산은 폐허에 자리하는 박제에 불과하다. 지석묘를 비롯한 각종 문화유산을 통해 과거인들의 세계관을 읽고, 그것을 현실에서 반추해보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왜 우리는 문화유산을 보존해야 하는가? 이 일차적인 질문에다가 치열한 논쟁과 고민을 덧붙여 제주의 문화유산 계획들이 하나둘씩 만들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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