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대권(大權) 도전 가능성을 시사한 것은 제주포럼 일정이 시작된 지난 25일이었다. 이날 반 사무총장은 중견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내년 1월 1일이면 한국사람이 된다”며 “제가 유엔 사무총장에서 돌아오면 국민으로서의 역할을 더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나아가 반 총장은 “국가(한국)가 너무 분열돼 있다. 정치지도자들이 국가통합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면서 “누군가 대통합(大統合)을 선언하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상의 대권 도전을 시사(示唆)한 것이다.
이후 신문·방송들이 연일 ‘반기문 대망론’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치권도 발칵 뒤집혔다. 여권에선 잠복했던 대권 경쟁이 반기문 발언으로 재점화됐다. 잠룡(潛龍) 중 한 명인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여권의 후보군이 많지 않은데 경험과 경륜이 풍부한 반 총장이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해준 것은 국민께 희망을 드린 것”이라고 환영했다.
이에 반해 야권은 기존의 입장과는 달리 공세적 태도로 돌아서 반 총장을 집중 견제하기 시작했다. 정장선 더불어민주당 총무본부장은 “경제 상황도 안 좋은데 너도나도 대선에 끼어드는 모습에 우려가 있다”며 “유엔총회 결의안에도 정부 직책을 삼가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고 에둘러 비판했다.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도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적절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가세했다.
이 같은 반응에 대해 반 총장은 제주포럼 참석자들과의 오찬에서 “본뜻보다 앞서 나가고 있다”고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반기문 대망론(大望論)’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전망이다.
반기문 사무총장은 26일 열린 제11회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 개회식 기조연설을 통해 “북한은 더 이상의 도발을 중단하고, 국제적인 의무를 완전히 준수하는 방향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이 핵실험 등을 강행할 경우 전 세계가 단호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조연설은 언론과 정치권의 ‘반기문 대망론’ 등에 파묻혀 빛이 바랬다. 제주포럼의 의미와 성과 또한 함께 퇴색(退色)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