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城)은 목축문화의 유산
잣(城)은 목축문화의 유산
  • 허계구 논설위원
  • 승인 2005.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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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10소장(馬牧場)

조선시대 제주도의 마(馬)목장은 세종 11년(1429)년경에 제주출신 고득종(高得宗)의 건의에 따라 한라산 중산간지역(해발 200~600m)에 해안지역의 촌락(마을)과 경지와의 경계를 돌로 쌓은 것이 하잣(下城)이며 이를 10개로 나누어 10소장이 설치되었고 각 목장의 둘레는 45~60리였다.
한라산 고산지대(산림지대)에 쌓은 것이 상잣(上城)이고, 다른 소장의 계곡이나 산림지대로 흩어져 죽거나 찾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 큰 하천을 이용하거나 돌을 쌓았는데 이를 간장(선잣)이라고 하며 이것이 각 소장과의 경계이다.

또한 정조 4년(1780)에 3·5소장에 축성방식이 다른 상잣을 쌓은 것으로 보아 다른 소장은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상잣과 하잣에는 사람과 말이 출입할 수 있는 문을 설치하였는데 이를 양(梁:도:살체기문:나뭇가지로 바람이 잘 통하도록 만든 문)이라고 부른다.
조선말기(1800년대 후기)와 일본강점기 때 토지구획정리를 하면서 상잣 내·외에서 방목이 곤란하여 중잣이라고 불리는 돌담을 쌓아 겨울과 봄철에는 중잣과 하잣에서, 여름과 가을철에는 중잣과 상잣 사이에서 방목하였다.

조선시대 제주도 목장(소장)에서 종년방목(終年放牧:연중방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온화한 기후 조건 때문에 가능했으나 겨울철 마른 풀과 비·눈의 피해로 영양실조에 걸려 폐사된 말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겨울철 마관리를 위해 각 목장마다 피우설가(避雨雪家:관리사)를 지어 건초를 쌓아두고 마르고 병들어 보이는 말은 여기서 관리하여 이듬해 봄철에 방목하였다. 말들이 먹었던 목초는 대부분 새(띠), 자골, 칡의 잎과 줄기, 어욱, 제주조릿대, 나뭇잎과 껍질, 야초와 나무껍질 등이었다.

현재 이 잣성들을 이용하거나 더 높게 철조망을 쳐 4월에서 12월까지 방목을 하고 있는 목장들(금성목장, 의귀리 마을공동목장, 오름목장, 납읍 공동목장, Thoroughbred 사육농가:봉개동 산 71번지일대와 한우·젖소목장 등)을 볼 수 있는데 목장 내에 마사 또는 대피소가 있고 수도시설과 목초재배가 잘 되어 방목을 주로 하면서 겨울철(1~2월)에 풀이 부족하면 건초와 배합사료로 사육하고 있다.

  <제주도 목마장의 변천(3) 끝>

제주도 목마장의 잣(城)은 목축문화유산이다

잣은 고어(古語)로 성(城)의 뜻이며 한라산기슭의 소장(조선시대 목장:목마장)경계에 돌들(겹)을 높이 1.20~1.80m로 길게 쌓은 목책(牧柵)의 돌담을 말하며 이를 흔히 잣성(城)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제주도의 목마장은 세종 11년(1429)년에 제주출신 고득종(高得宗)의 건의에 따라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상호군 박호문을 파견하여 목마장의 적부를 조사케 하고 도안무사(都安撫使) 장우량에 명하여 한라산 중턱 지역165리에 돌담을 쌓기 시작하였고 세종12년에 10소장의 기초를 확립한 후에도 소장의 축장(築墻)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성종24년(1491)에 고대필(고득종 아들) 이 올린 보고에 따르면 한라산 중턱에 10목장(소장)이 설치되었는데(漢拏山腰周回 設十牧場) 소장의 주위가 45~60리이었고 소장 안내는 환장(環場)과 사장(蛇場)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 잣성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중산간(해발 200~600m)에 해안지역의 촌락(마을)과 경지(耕地)와의 경계를 돌로 쌓은 것이 하잣(下城), 고산 지대에 쌓은 것이 상잣(上城)이며 말(馬)들이 다른 소장의 계곡이나 산림지대로 흩어져 죽거나 찾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 큰 하천을 이용하거나 돌을 쌓았는데 이를 간장(間墻:선잣)이라고 하며 이것이 각 소장과의 경계이다.

이들 잣에 대한 기록을 보면 정조 4년(1780) 김영수목사때 1·2소장의 간장 936步, 횡장(橫墻)은 3소장의1,110보와 5소장 1530步 그리고 산마장에 1만1013步, 제주계록(1846~1886)의하면 마정(馬政)에 당시 잣성을 장(墻, 담장)과 원(垣, 낮은 담)으로 상하장원(上下墻垣:교래리에서 한라산쪽에 있는 상·하 잣성)이라고 표시되어있다.
이를 10개로 나누어 제주도에 10소장(목장)과 상장을 경계로 하여 산장이 설치되었다.
각 목장의 둘레는 45~60리였으며 상잣과 하잣에는 사람과 제주마가 출입할 수 있는 문을 설치하였는데 이를 도(梁:살체기문:나무 가지로 바람이 통하도록 만든 문)이라고 부른다. 

1800년대 후기와 일본강점기때 토지구획정리와 마을공동목장개설을 하면서 상잣 내에 방목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위해 중잣을 쌓아 겨울과 봄철에는 중잣과 하잣에서, 여름과 가을철에는 중잣과 상잣 사이에서 방목하였다.
조선시대 제주도 소장(목장)에서 종년방목(終年放牧:연중방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온화한 기후 조건 때문에 가능했으나 겨울철 마른 풀과 비·눈의 피해로 영양실조에 걸려 폐사된 말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겨울철 말 관리를 위해 각 목장마다 피우설가(避雨雪家:관리사)를 지어 건초를 쌓아두고 마르고 병들어 보이는 말은 여기서 관리하여 이듬해 봄철에 방목하였다.
말들이 먹었던 목초는 대부분 새(띠), 자골, 칡의 잎과 줄기, 어욱, 얼룩 조릿대, 나뭇잎과 껍질, 야초와 나무껍질 등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제주 교래 출신인 고득종(高得宗, 1388~1452) 자는 자부(子傅), 호는 영곡(靈谷)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조선초기의 문신이다.
상호군 봉지(鳳智)의 아들로 태종 13년(1413) 효행으로 천거받아 음직으로 직장(直長)이 되고 이듬해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대호군(大護軍)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등을 거쳐 세종 1년(1419)에 경차관으로 제주에 내려와 농사를 장려하기 위하여 양전(量田)을 실시하고 수조법(收組法)을 마련하여 양곡을 비축케하였다.

세종 7년(1425)에 진상마 20필과 공마 10필을 압령(押領)하고 선위별감인 고득종이 돌아가는 배에 따라가게 하였는데, 화달도(火達島) 근처에서 태풍으로 파선되어 차용리(車用利), 안방현(安邦顯) 및 동선의 격군(格軍) 8명과 말 30필 모두가 익사했으나 고득종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귀환하였다. 이때의 시문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歸帆十幅不勝風 白浪連天未辨東
 此身若使葬魚腹 報國忠誠一夢中

 정처 없이 흘러가는 작은 돛단배, 물결은 하늘에 닿고 고향길 잃어
 고기의 배에 묻히어도 한은 없지만 위국충성 꿈결에도 잊을 수 없네
세종 9년(1427)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을 지냈고, 세종 11년(1429)에는 한라산 기슭에 우마의 농작물 피해를 막기 위해 돌담을 쌓아 목마장을 만들도록 함으로서 10소장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는 곧 제주도가 명마 생산기지가 된 것이다.
세종 12년(1430) 제주도 역참(驛站) 관리개선책을 건의하였으나 존폐가 거듭되다가 중지되어 방호소가 그 임무를 맡게 되어 해안도로와 한라산을 관통하는 도로(정의현, 대정현에서 제주목까지의 도로)가 정비되었다.

세종 15년(1433)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고 이듬해 호조참의(戶曹參議)로서 종마진공사(種馬進貢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우마도적과 그 가족 650여명을 평안도로 강제 이주시키도록 건의하였다.
세종 19년(1439) 통신사가 되어 부사 윤인보(尹仁甫), 서장관 김몽례(金夢禮)와 함께 일본에 가서 아시카가(足利義敎)와 오우치(大內持世)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돌아왔다. 세종 21년(1441) 예조참의(禮曺參議)로 다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그때 함부로 약재를 청하고 또 이만주(李滿柱)와 처치를 요구한 일로 귀국 즉시 강음현(江陰縣)에 유배되었다.

2년뒤 풀려나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역임하고 1448년 도전운사(都轉運使)가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의 쌀을 평안도로 운반하는 일을 하였다.
이와 같이 고득종은 제주의 발전과 문화향상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니 나라에서 받은 사용록(司勇祿)과 자제직록(子第職祿)을 서울에 유학오는 제주인들을 위해 사용함으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또한 정청(政廳)인 홍화각(弘化閣)과 병사들의 훈련장인 관덕정을 창건하도록 하였다.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향년 65세로 별세하였는데 사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헌종 9년(1843)에 제주 유림(儒林)들의 귤림서원 옆(오현단)에 향현사(鄕賢祠)를 세우고 제향을 모셨으나 고종때 철사(撤祠)되었고 오현단 주변은 고득종의 집터이며 탐라순력도의 고원방고(羔園訪古)는 염돈과원이라고 불리우는 곳으로 염돈촌(羔屯村)은 서귀포시 영남동으로 과거 고득종의 별장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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