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문명의 급속한 발달로 인하여 우리의 생활 패턴 역시 날로 변하고 있다.
“5리 물을 길어다가 아홉 솥에 불을 때고...”(한국민요) 지은 밥으로 3대의 대가족이 모여 아침 식사를 하던 모습은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소가 끄는 달구지에 올라앉아 덜컹거리는 길에서 엉덩이를 아파하며 이동하던 일은 이미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다.
도구를 만드는 인간은 생활의 편리를 위하여 자동차를 만들어 내었다. 자동차는 아주 신속하고 빠르게 우리를 목적지로 이동시켜 준다. 자동차는 이제 우리가 의심스러움, 발가벗은 듯한 느낌, 그리고 불완전함을 자각하지 않고 입는 옷과 같은 물품이 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필수적으로 지녀야 할 용품이 무엇일 것인가? 그것은 신용카드, 휴대전화, 그리고 자동차라고 지적한 사람이 있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대인의 생활 패턴을 잘 지적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승용차는 오늘의 생활 필수품이 되었다.
며칠 전에 골목길을 걸어가다가 목격한 일이다. 40대쯤으로 보이는 두 남녀가 승용차를 마주 세워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마 좁은 길에서 마주친 두 승용차가 서로 비키라고 한 것이 언쟁의 발단으로 보였다.
나는 이내 자리를 뜨고 말았지만, 덜 익은 열매를 씹은 것처럼 떨떠름한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편리한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인간은 양보의 품성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남을 이롭게 하는 양보는 실로 자신을 이롭게 하는 근본이다”(채근담)는 말을 들을 귀가 없어지고 말았는가?
우리는 루터의 “어록”에 나오는 산양의 우화를 알고 있다. 두 마리 산양이 좁은 다리 위에서 만났다. 어떻게 할 것인가? 산양은 도무지 뒷걸음칠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좁은 다리에서 옆으로 비켜 지나갈 수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연은 이 산양에게 난관을 무사히 돌파할 수 있는 방안을 가르쳐 주었다. 한 쪽이 무릎을 꿇어 엎드리고, 다른 쪽이 그 위를 건너 넘어가면 되었던 것이다. 자연은 어찌하여 핸들을 잡은 두 인간에게 이런 슬기를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은 엎드릴 필요조차 없었다. 한 쪽이 약간만, 아주 약간만 뒤로 물러나면 충분했던 것이다.
양보는 기계 이상으로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윤활유의 구실을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무거운 로울러로도 납작하게 깔아 뭉겔 수 없는 탄력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양보가 약자의 미덕이거나, 자기에게만 커다란 손해를 가져온다는 그릇된 착각에 빠져 있다.
‘양보는 큰 힘이 있다. 평생토록 길을 양보해도 100보에 이르지 않을 것이며, 평생토록 밭두렁을 양보해도 한 마지기를 잃지 않을 것이다’(소학)
과학문명은 우리의 생활 패턴을 바꾸어 놓으면서 편리한 필수용품을 엄청나게 제공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기계의 주인임을 포기할 때, 기계는 마침내 인간을 노예화하고 말 것이다. 기계가 참으로 인간을 이롭게 하는 도구로 남으려면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한 긍지와, 이웃을 친밀하게 융화시켜 주는 양보의 미덕이 그 바탕이다. 자동차의 운전에는 핸들을 잡고 조작하는 기술보다 인간의 의식 자체가 훨씬 중요하다고 지적된다. 주인 의식을 가다듬을 때, “주차 전쟁”이라는 낯선 말도 유행의 힘을 잃어갈 것이다.
김 영 환<전 오현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