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경이 무장대로 오인 살해
군인들 의해 마을에서 처형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에서 ‘4·3 추념식’이 열렸다.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장송곡이 공원 장내에 울려 퍼졌다. 광장에는 추모객들로 붐볐지만, 공원 한 편에 있는 ‘행방불명자 묘역’에는 까마귀 떼들만 맴을 돌며 어지러이 날고 있었다.
이순하(83) 할아버지는 그런 까마귀 떼 아래에서 형님의 표석을 찾고 있었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 다리도 아프고 기억력도 안 좋아져서 형님 비석을 잘 못 찾겠네”
이 할아버지는 같이 온 부인 오춘자(81) 할머니와 함께 한동안 헤맨 뒤 형님 이름이 적힌 표석을 찾아냈다. ‘남원면 신례리 1120번지 1933년 2월2일생 이순우…1948년 12월13일 이후 제주지역에서 행불’ 부부는 늘 그래왔다는 듯이 익숙하게 제사 음식들을 꺼내 표석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부부가 번갈아서 절을 마치자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 할아버지는 제수 음식을 정리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16살 때인 1948년 형님이 한라산으로 들어갔다가 무장대로 오인받아 군경에게 죽었어. 그 일만 생각하면 눈물만 나와. 형님이 너무 보고 싶은데 이젠 몸 이곳저곳 아파서 자주 찾아뵙지도 못 해”
오춘자 할머니도 13살 때 오빠를 잃었다고 했다. “그 시절엔 군인들이 날마다 마을로 와서 사람들을 데리고 가곤 했어. 그 날도 군인들이 마을 청년들을 불러 모으니깐 오빠더러 집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 괜히 왔다가 군인들한테 끌려갔지. 결국 마을에서 처형당했어”
오 할머니의 오빠는 마을 사람들이 나중에 시신을 수습해서 묻어줬다고 했다. 하지만 이순하 할아버지의 형은 여전히 행방불명이다. “텔레비전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보여줄 때 가슴이 찢어졌어. 그 사람들은 살아있으니깐 만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오 할머니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이 할아버지는 표석을 등지고 먼 산을 바라봤다.
비가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지팡이를 의지한 채 집으로 향했다. 그 뒤로 4·3 사건으로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3887개의 표석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