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신’ 클리오 신전에 헌정하는 4·3
‘역사의 신’ 클리오 신전에 헌정하는 4·3
  • 김은석
  • 승인 2016.0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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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평화교육 실천 시작
현장에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교육 목적은 ‘역사적 공감’

‘4·3 교과서’ 더 살펴봤으면
이데올로기 아닌 인간교육 지향
역사교육 새 패러다임 기대

나치가 사람들을 집단 학살한 후 땅에 묻었다. 그러나 증거를 없애기 위해 그 시체를 도로 파내어 소각하기로 했다. 수용소에 잡혀와 있던 한 유대인이 땅에 묻힌 시체를 꺼내는 노역에 동원됐다. 그가 땅을 파내려가자 시체들이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그 시체 중에 다름 아닌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 그는 이내 전율하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나치 병사에게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애원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9시간30분에 달하는 다큐멘터리 ‘쇼아’의 한 장면이다.

현대의 지성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인간만큼 현실을 직시하기를 두려워하는 동물은 없다”고 했다. 60여년 전 제주의 비극, 그러나 계절 하나가 봄이 되려고 하는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 앞에서도 겨울은 우리에게 쉽게 봄의 자리를 내주지는 않는 것 같다.

반공이데올로기가 희생자들의 기억을 억압함으로써 반세기 동안 공식화될 수 없었다. 침묵과 한(恨)만이 응어리져 있었다.

물론 국가추념일 지정, 제주4·3은 공적 역사의 계기가 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4월은 여전히 잔인한 달인지도 모른다. 대통령의 4·3 추념식 행사 불참이 그렇고, 유족들 또한 여전히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도 그렇다.

고통의 기억을 간직한다는 것은 고난을 겪었던 집단의 정체성의 핵심이다. 이 땅에 우리가 기억해내고 반추하지 않는 한 현재 살아서 약동하는 봄을 맞이할 수가 없다.

우리 교육감은 이런 현실인식에서 4·3평화교육을 실천의 장으로 옮겨왔다. 비로소 4·3은 망각에서 기억으로 ‘역사의 신’ 클리오(Clio)의 신전에 헌정되는 뜻 깊은 순간이다. 이제 4·3을 교육의 현장에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학생들에게 과거를 기억하게 만드는 데 사용하는 것이 교과서이다. 그런데 교과서란 무엇인가? 초등학교 교과서 제작에 참여했던 어느 교수에 따르면 자신의 역할은 정해진 포맷에, 정해진 내용을 삽입하는 식으로 교과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탄식한 적이 있다.

물론 교육청에서 그럴 리 없다고 생각은 든다. 하지만 국사 국정교과서 문제로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한 것도 정부가 나서서 ‘하나의 기억’만을 선정하고, 다른 기억을 지워버릴 개연성 때문이었다.

역사 교과서는 안타깝게도 누가 집필하든 필연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나치가 전시에서 행한 유대인 학살, 일명 홀로코스트를 다룬 교과서의 경우 아무리 객관적으로 집필했다고 해도 막상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였던 집시·동성애자들의 살육도 있었기에 이 사건을 바라보는 계급적, 성적 시각에 따라 그 평가와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과거를 전달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우리가 진실로 학생들에게 4·3을 교육하려는 것은 4·3에 대한 ‘공감’을 위해서다. 희생자들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에 불과하다면 무엇 때문에 그것에 그토록 매달릴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교과서 서술에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공감’은 자칫 대상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동일시’의 심리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도덕적 위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픔을 가장한 아픔은 오히려 희생자에 대한 기만일 수가 있다.

아직 ‘4·3 교과서’가 나와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집필자들은 한번 더 살펴보았으면 한다. 4·3을 기억하는 자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할지, 이를 위해 4·3 역사교육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이데올로기 교육이 아니라 인간교육이며, 그 동안 망각의 단층 사이에서 피어오른 역사교육은 이러한 인간교육으로서의 역사교육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영화 ‘지슬’에 주목했던 것은 단순한 이유에서다. 그것은 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역사의식, 곧 집단의 기억을 있는 그대로 공유하려는 노력이다. 그 어떤 사건도 특정 집단의 일방적 기억 속에만 머문다면 의미를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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