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족 4명 잃고 부상 불구 보상조차 못받아

그날의 일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은 죄였다. 아픈 상처에 짓눌려 살던 소녀는 67년이 지나서야 그날, 4·3의 기억을 꺼낸다. "1949년 1월 17일. 아버지는 ‘당밭’에서 총살을 당했다. 삼대독자인 오빠를 품속에 안았던 어머니는 거센 총살 속에서 오빠만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어깨에 총을 맞아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때 나의 나이 7살이다."
1942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3동에서 태어난 윤옥화 할머니(73)는 제주4.3연구소가 30일 제주문예회관 소극장에서 마련한 열다섯 번째 4.3증언본풀이마당 ‘학살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死·삶을 말하다’에서 그동안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풀어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가족들을 마주하고 죽음 속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윤 할머니였지만, 정작 사회에서는 늘 '주홍글씨'로 읽혀왔기 때문이었을까 이날의 무대는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윤 할머니는 당시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아는 것이 없다던 윤 할머니는 낮과 밤에 순경과 군인들이 탄압하던 것부터, 신발도 못 신고 총살장에 끌려가던 것까지 읊으며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버지는 학교 운동장에서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언니는 마을의 큰 폭낭(팽나무)에서 돌아가셨다. 세 살이던 여동생은 총을 7군데 맞았는데, 3개월을 더 살다가 갔다. 그 애 이름이 옥희.”
하지만 윤 할머니와 그 가족들은 어지럽던 시절의 호적 정리가 안 됐었다는 이유로 유족으로서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윤 할머니는 “우리가 그 날 네 식구가 죽임을 당했는 데 아무런 보상을 못 받는다. 아버지가 당시에 혼인신고라는 것을 안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윤 할머니는 지금도 총상 휴유증이 있다. 어릴 적 상처라 거의 메워졌지만 살면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표적으로 남았다.
이날 본풀이마당에는 많은 유족들이 함께 했다. 유족들도 힘겹게 그날의 기억을 꺼낸 7살 윤 할머니의 모습에 함께 아파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편 4.3당시 1600여명이 살고 있던 북촌리는 600여명의 피해자가 발생해 마을 주민의 4분의 1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