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관리 부실 지적에 “예산·사유지 문제로”

“얘들아 사진 잘 나온다. 여기로 와!”
지난 26일 오전 11시 서귀포시 표선 해수욕장. 관광객들이 넓은 백사장 이곳저곳을 뛰어 다니며 ‘왁자지껄’ 사진을 찍고 있었다. 지금은 웃음소리 가득한 이곳은 4‧3 사건 당시 총소리와 비명이 끊이지 않았던 학살 터였다. 표선면, 남원면 일대 주민들이 군인과 경찰들에 의해 대규모로 집단 총살당했을 뿐만 아니라 간간이 한두 명씩 끌려 나와 총살되는 등 수백여 명이 이곳에서 죽었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 대부분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서울에서 여행 온 대학생 김모(21‧여)씨는 “이곳이 그런 아픔이 있는 장소인지 몰랐다. 4‧3 사건에 대해서 오늘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가족들과 함께 제주에 놀러 온 장모(52)씨도 “근처에 큰 호텔도 있고, 민속마을도 있어서 평화로운 관광지인 줄 알았는데 민간인들이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상황이 이러했지만, 이곳 주변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조그마한 위령탑 하나 없는 실정이다. 모 호텔 가는 길 구석진 곳에 그날의 사건을 알리는 푯말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근처에 사는 희생자 유가족 양모(64‧여)씨는 “분명 학살 등의 끔찍한 일이 있었던 곳인데도 이를 모르거나 애써 기억에서 지우고 즐기기만 하는 것은 희생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제주 4‧3연구소에서 내놓은 ‘제주 4‧3유적 종합정비 및 유해 발굴 기본계획’에 따르면 표선해수욕장과 같은 학살 터가 제주도에 154곳이 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지금까지 이 가운데 3곳에서만 진입로 정비, 위령비‧기념관 건립 등을 했다. 4‧3 사건 이후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제주도정 차원에서 거의 유적 관리에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제주도 관계자는 “4‧3 관련 유적지 대부분이 사유지여서 이를 사들이는 데 예산 부족 등의 문제로 한계가 있었다”며 “푯말 하나 세우는 것도 땅 주인들이 땅값 떨어진다고 반발해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더욱이 최근 몇 년 새 제주도에 불어닥친 개발 광풍으로 사유지에 자리한 학살 터 등 4‧3 유적들이 훼손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4‧3 유족회 관계자는 “최근 유족회 각 지회에서 4‧3 유적들을 살펴보면 ‘잃어버린 마을’인 서귀포시 영남동처럼 펜션 등의 건설로 훼손되는 경우가 많다”며 “이에 대해 제주도 차원에서 지방비를 늘려서라도 유적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