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직 지사 대거 여당 선대위에
“편 가르기에 앞장” 논란 자초
원로의 힘 ‘불편부당’에서 나와
한쪽으로 치우치면 권위 잃어
지역사회 향도 역할에도 한계
떠난 후 아름다운 모습 아쉬워
‘진정한 리더는 떠난 후에 아름답다’(중앙북스, 2008). 지미 카터(92) 미국 전 대통령이 퇴임 후의 삶을 기술한 책이다. 이 번역서 제목처럼 지미 카터는 퇴임 후 두드러진 활동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는 정치인이다.
그는 재임(1977~1981년) 당시 미국 역사상 가장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연임에도 실패했다. 그러나 백악관을 떠난 뒤 모범적인 활동을 펼치면서 인기 있는 전직 대통령 중 하나가 됐다. 그는 퇴임한 이듬해 카터재단을 설립해 전 세계 민주주의·인권 개선과 환경 문제, 국제분쟁 해결 등에 힘을 기울였다. 무주택자들을 위한 국제 해비타트의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세계 평화와 인권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카터는 지금까지도 미국 내 원로 정치 지도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
이런 카터의 아름다운 모습은 부러움을 자아낸다. 우리나라에서는 퇴임 이후에도 원로로서 국민으로부터 존경 받는 대통령이나 정치 지도자가 드물다. “우리 사회에 진정한 원로가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퇴역 정치인이 카터처럼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역이 아닌 고령의 정치 원로들이 이당저당 옮겨 다니는 볼썽사나운 장면도 가끔 보인다. ‘올드보이’들이 선거판을 기웃거리는 일은 다반사다. 이들에게서 원로로서의 품격은 찾아 볼 수 없다.
제주지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전직 도지사 등이 원로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 지 의문이다. 사회가 그들을 대접하고 활용하지 않는 측면도 있지만 본인들도 원로 역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부는 각종 선거전의 한복판에 자리하면서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 최근 김태환·우근민·김문탁·이군보 전 지사가 4·13총선 새누리당 제주도당 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을 맡았다.
이를 두고 야당 후보들은 “선대위에 참여하면서 편 가르기에 앞장서고 있다. 제주미래를 걱정한다면 선거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지역사회 일각에서도 곱지 않을 시선을 보내고 있다. “누릴 것 다 누린 분들이 뭘 또 바라서…”
물론 이들의 선대위 참여는 당적을 가졌거나 하는 등의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중했어야 했다. 특정 정당 후보를 지원하는 것보다 지역사회 원로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주사회는 해군기지와 제2공항 추진 등으로 인해 주민 간 갈등과 반목 양상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에 거중 조정 등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원로들이 특정 정파 편에 서 그 역할을 못하는 것은 사회적 손실이다. 원로의 힘은 ‘불편부당(不偏不黨)’함에서 나온다. 선거에서 한 쪽으로 치우치면 원로로서의 권위는 없어진다. 새누리당 선대위인 ‘제주도민 승리위원회’는 지난 25일 출범식에서 “오로지 도민만 바라보면서 민생과 경제를 살리고, 제주사회 통합의 전기를 놓기 위해 혼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전직 지사들이 대거 선대위에 참여하면서 선거 후 사회통합은 더 어렵게 됐다고 봐야 한다. 선거는 진영 논리가 강하게 작용하는 게임이다. 내편이 아니면 적이다. 요즘 선거전은 정책이 실종된 채 ‘이전투구’ 식 싸움으로 전개된다. 흙탕물이 원로들에게 튈 수도 있다.
사회는 법과 제도만으로 올바로 유지될 수 없다. 과거 마을에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원로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원로는 지역 사회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향도 역할을 한다. 사회가 복잡다단하고 구성원 간 갈등이 심화되는 오늘날 존경 받는 원로의 존재는 더 절실하다. 그런데도 선거판에 휩쓸려 원로다운 원로가 줄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시인 이형기는 ‘낙화(落花)’라는 시에서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했다. 여기에 한마디 덧붙여야 할 것 같다. “공직을 떠난 후 처신을 잘 하면 더욱 아름답다.” 그런 원로들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