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의 최대 희생지인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이곳에서는 하룻밤 사이 300여호(戶)가 불타고, 500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곡절 없는 죽음을 맞았다. 그야말로 미증유의 대참사(大慘死)였다.
그로부터 68년이란 세월이 흐른 2016년 3월28일, 비극의 장소인 북촌초등학교에서 ‘4·3평화인권교육’이 진행됐다. 이날 명예교사로 나선 사람은 당시 두 살배기였던 황요범(70)씨. 황씨가 들려준 ‘4·3 이야기’는 참혹함과 처연함 그 자체였다.
평화스러운 북촌마을에 비극(悲劇)이 싹 튼 것은 1948년 6월이었다. 포구에 정박 중이던 우도 배에서 경찰 2명이 무장대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원인이 됐다. 이를 계기로 북촌리는 ‘빨갱이 마을’로 낙인찍혔다.
초토화(焦土化) 작전이 극에 달하던 그해 11월 어느 날, 북촌리 사람들은 군부대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5·10 총선거’에 불참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속엔 서른 살 남짓이던 요범씨 아버지도 포함됐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싸늘한 주검 뿐이었다.
하지만 이는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듬해인 1949년 양력 1월, 북촌 너븐숭이 근처에서 군인 2명이 죽은 채 발견되자 ‘대도륙(大屠戮)’이 시작됐다. 군인들은 집에 불을 지르는가 하면 주민들을 집결시켜 놓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등 아비규환(阿鼻叫喚)이 따로 없었다.
‘4·3’의 난리통에 요범의 어미는 남편과 시아버지, 두 명의 시아주버니와 친정부모, 남동생 등 가족의 대부분을 잃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했다. 비극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아들과 시어머니, 부모를 잃은 조카 네 명을 데리고 하루하루 질긴 목숨을 이어갔다. 황요범씨가 “4·3은 가엾고 고됐던 내 어머니의 삶”이었다고 회고하는 이유다.
이날 ‘평화·인권교육’엔 북촌초 3~6학년생 50여명과 마을주민들이 함께 참여했다. 강연을 들은 아이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믿기가 어렵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 ‘있을 수 없는 일’이 60여년 전 평화스러운 이 땅 제주에서 벌어졌으며, 아직도 ‘미완(未完)’으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제주4·3의 현주소다.
교육을 마친 황씨는 “귀동냥으로 들었던 그날의 참상(慘狀)을 서푼이야기로 대신한다는 게 부담스럽지만 후세들이 꼭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강연에 나섰다”고 말했다. 그래서 마지막 당부의 말도 “4·3을 잊지 말고 꼭 기억해주세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