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적 아버지는 면사무소 호적계에 근무하셨다. 한자에 능통하고 필체가 유난히 뛰어나서 호적 정리를 남보다 월등히 잘 하셨다고 한다. 꼼꼼하고 성실한 성품 탓에 아버지께서 하루라도 출근을 안 하시면 면사무소가 잘 안돌아 간다고 할 정도로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 형제들은 그런 아버지가 너무 싫었다. 집안일 보다는 사무실 일이 우선이고, 하물며 제삿날도 어머니께서 미리 귀뜀을 해줘야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참석하곤 했으며, 항상 면사무소는 아버지의 유일한 일터이고 쉼터였다.
아버지가 집으로 생활비를 가져오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한 번도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몇 푼 안 되는 월급조차도 직원 가족이 아파서 병원 간다면 털어주고, 옆집 할머니가 명절을 못 지내서 걱정하면 쌀이랑 돼지고기 몇 근 사다드리다 보니 정작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 져야하는 아버지의 주머니는 항상 비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돈이 없어서 수학여행을 안 보내준다는 아버지께 “나는 차라리 동문시장에서 쥐포장사를 하는 일이 있어도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겠으며, 내 자식들이 원하면 끝까지 돌봐주는 부모가 되겠다고” 반항하면서 아버지의 가슴을 한없이 아프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수십 년이 지나 이순을 바라보는 지금에야 뒤늦게 아버지를 생각하면 뭉클하게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비록 가난하고 가족들에게 풍족하게 못 해줬지만 청렴한 공무원으로서 이웃을 가족처럼 섬기는 헌신적인 배려와 흐트러짐 없이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하고, 청빈과 성실을 몸소 실천하신 아버지의 높은 위상은 가슴속 깊이 존경하는 마음이 움트게 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수년이 지났지만 지난날 아버지가 들려주신 “원칙과 신뢰를 중심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고 최선을 다하라,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익을 우선하라, 내 것이 아니면 남의 것을 함부로 탐하지 마라, 약속시간은 적어도 15분전에 나가서 남의 시간을 축내지 마라, 사무실에서 쓰는 종이 한장 연필 한 자루 헛되이 쓰지 마라” 는 등 수많은 교훈들은 이제 크고 작은 메아리가 돼 다시 내 자식들에게 되 뇌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