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너무나 '정부'스러운 그대
[기자수첩] 너무나 '정부'스러운 그대
  • 문정임 기자
  • 승인 2016.0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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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을 선(先) 집행하겠으니 학부모와 어린이집 관계자들은 아무 걱정 말라는 내용이었다. 고마웠다. 나 역시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있는 엄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직하진 않았다.

우선 오늘 원 지사는 정부와 지역 교육청이 누리과정 예산을 두고 공방을 벌이는 사태의 본질을 언급하지 않았다. 올해 분 어린이집 누리과정 보육료(485억원중 도교육청이 미 편성한 382억원)를 무엇으로 선집행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도 제시하지 않았다. 대신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손사래를 쳤다. 원 지사가 황급히 자리를 떠나고 마이크를 이어받은 김정학 기획조정실장도 마찬가지였다. 예산을 어떻게 충당할 것이냐는 질문에 “제주도의 예산이 4조가 넘는다” “과정은 나중에 얘기하자” “그렇게만 알아 달라”고, 말했다. 마치 통 크게 한턱내는 삼촌 같았다.

같은 시각, 도교육청은 ‘새’가 됐다. 회견에 앞서 김정학 기획조정실장이 교육감을 찾았지만 ‘통보’로 읽힌다. 이석문 교육감 역시 선출직으로 도민들의 표심을 읽어야 하는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그가 예산 편성 대신 타 지역 교육청들과 대정부 설득에 나선 것은 재정난 때문이다. 김 실장의 말처럼 제주도의 예산은 4조가 넘고 도교육청의 한해 살림규모는 8000억원 언저리다. 지자체가 관할권을 쥔 어린이집 예산까지 감당하기에는 458억원(2016년 기준)의 덩치가 너무 크다는 것을 오늘 도정은 괘념치 않은 듯 보였다.

게다가 도청의 선 집행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원 지사가 새삼스러운 듯 밝힌 오늘 회견의 요지는, 사실 그동안 교육청이 여러 차례 도청을 찾아 요청한 사안이고 이 예산은 누리과정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도가 교육청에 매년 주는 법정전출금에서 공제하는 방식으로 계상이 가능해 도청으로서는 지불해야 할 기회비용조차 없는 사안이다.

나는 매일 아침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다. 하지만 누리과정 문제가 대충 해결되기를 바란 적이 없다. 모든 것은 정직하게 토론하고 약속과 사리에 맞게 이행돼야 한다. 누리과정 예산이 지역 교육청에 재정압박을 주면 초중등 교육도 안녕할 수 없다. 오늘 제주국제자유도시를 지향하는 제주도 집행부의 태도는 소통이 없는 정부와 너무 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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