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 항일운동은 조천만세운동 및 법정사 항일운동과 함께 제주도의 ‘3대 항일(抗日)운동’으로 평가받는다. 1931년 6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전개된 이 운동은 일본인 상인만을 위한 어용(御用) 해녀조합에 맞선 제주해녀들의 항거였다.
이와 관련된 집회 및 시위 횟수가 연 230여회에 달했고, 여기에 참가한 연인원도 1만7000여명에 이른다. 특히 세화오일장이 열린 1932년 1월12일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날 해녀들은 이 지역을 순찰하던 일본인 도사(당시 제주도지사)에게 지정판매제 철폐 등을 강하게 요구했고, 그 기세에 눌린 도사(島司)는 마침내 해녀들의 요구를 수용한다.
일제의 폭정에 여자의 몸인 해녀들이 감연히 떨쳐 일어난 것은 당시로선 유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광복이 된 이후 해녀항일운동을 바라보는 정부의 시각은 ‘편협함’ 그 자체였다. 2000년대 들어 이뤄진 독립유공자 심사에서 운동을 주도했던 김옥련·부춘화·부덕량 등 단 11명만이 선정됐다.
가장 아쉬운 대목은 해녀항일운동을 이끌었던 5인의 해녀 가운데 고순효·김계석은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했다. 관련기록 등 자료가 부족한데다 심사 과정에서 ‘이념 문제’가 결부됐기 때문이라는 게 한역사학자의 해석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해녀항일운동이 역사 속에만 ‘박제(剝製)’된 채 점차 잊혀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인 도사’를 굴복시킨 역사의 현장인 옛 세화주재소(현 구좌파출소) 등엔 그 흔한 기념비나 안내판조차 없다.
도내 초중고의 역사 교재에도 해녀(海女)항쟁에 대한 설명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에 분연하게 맞섰던 제주해녀들의 역사가 후손들의 무관심으로 잊혀져가고 있는 것이다.
제주의 독특한 ‘해녀문화’는 세계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제주자치도가 제주해녀를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및 FAO 세계농업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해 제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엔 해녀들의 ‘역사적 일면’도 포함돼야 할 터인데, 기념비 하나조차 없는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