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막에 쓰인 ‘젊은 날의 자화상’
현수막에 쓰인 ‘젊은 날의 자화상’
  • 고상현 기자
  • 승인 2016.02.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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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졸업식 다음날 한적한 교정엔 현수막만 나부껴
친구·후배들의 정성 듬뿍…‘취업 문제’ 유희로 승화

20일 오후 1시 제주대학교. 전날의 시끌벅적함은 온데간데없었다. 19일 제주대에서는 학사 1649명, 석사 254명, 박사 44명 등 총 1947명이 정든 학교를 떠났다. 한적한 교정에는 선배들의 졸업식을 위해 후배들이 정성스레 준비한 현수막만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색색의 천에는 대부분 졸업을 축하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학생들 저마다의 밝고, 재치 있는 표현들이 눈에 띄었다. “전통(전자통신학과)의 전통을 빛냈다고 전해라” “(졸업) 해야 하는데... 하기 싫은데...” “얼굴만점 몸매 만점 영양만점 식품영양 벌써 졸업이니”

이번에 현수막 제작에 참여한 언론홍보학과 조현아(22)씨는 “현수막을 만드는 데 2만 원 정도밖에 안 들지만, 어떻게 만들지 학생들이 며칠씩 고민한다. 현수막에 정성이 듬뿍 담겨 있다”고 말했다.

캠퍼스 안에는 학생들이 만든 현수막만 걸려 있는 게 아니었다. 학교 측에서 만든 졸업생들의 취업을 축하하는 걸개도 걸려 있었다. 졸업생들 가운데 원하는 직장을 얻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이 걸개는 학생들이 만든 밝은 현수막의 이면을 보여주는 듯했다.

취업을 위해 휴학한 김 모(24)씨는 “친구들 대부분이 학교 다니면서 알바하고, 공부하고, 스펙을 쌓으며 열심히 산다”며 “하지만 원하는 직장을 구하는게 쉽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녹록지 않은 현실 앞에서 학생들은 위축되거나 기죽지 않았다. “졸업한다고 걱정하지 말고 설레어라” “XXX(25) 무직 직장구함 010-8460-111X” “XX OO 드디어 ‘졸업’인거니 아니면 ‘백조’인거니” 학생들은 커다란 산이 돼버린 취업에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이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이 학교에 재직 중인 양 모(64) 교수는 “개구쟁이처럼 아이들이 졸업 축하글귀를 써넣었지만, 취업 문제는 재학생이든 졸업생이든 가장 큰 현실적 문제”라며 “그런데도 밝은 모습을 잃지 않고 졸업생들을 격려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대견스럽다”고 얘기했다.

선배들이 떠나간 자리는 얼마 뒤면 신입생들로 채워질 것이다.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흔들리겠지만, 늘 그랬듯 청춘들은 젊음 특유의 긍정적 에너지로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겨낼 것이다. 텅 빈 교정엔 형형색색의 현수막이 바람에 산들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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