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인터뷰인가”
“누구를 위한 인터뷰인가”
  • 서인희
  • 승인 2016.02.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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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P잡지사의 인터뷰 제안
‘조건’으로 잡지 000부 구매 요구
난생 처음 들어온 ‘협찬’ 인터뷰

어려운 예술가들에게 ‘상처’
기사 내용도 ‘좋게만’ 왜곡 개연성
‘돈’ 예술정신까지 살 수는 없어

30여년 만의 폭설로 9만여 관광객들의 발이 제주에 꽁꽁 묶였던 지난달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립’이란 걸 경험했다. 수인처럼 유수암에 갇힌 상태에서 수도관까지 파열, 생수로 세수까지 해결했던 ‘짜릿함’의 시간이었다.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흘려버렸던 물의 소중함까지 절실하게 느꼈던 나름 깨달음의 ‘고립’이었다.

눈이 녹아들면서 애기동백의 빨간 꽃망울이 터지고 흙냄새가 마당가득 채워지던 날, 고요를 깨고 서울지역 번호가 찍힌 전화를 받았다. P월간 잡지사 기자라고 자신을 밝히며 말을 이어 나가더니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거였다.

어디서 내 프로필을 입수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제주로 내려와 1시에 유수암 내 작업실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이른 잠에서 깨어 1층 작업실로 내려가 손님맞이 청소를 끝내고 기분 좋게 커피 한잔을 하려는데 어제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약속시간 변경인가?” 생각하며 전화를 받자 기자는 “인터뷰 중 오해가 있을까봐 미리 얘기하고 출발해야 할 것 같다”며 “우리 잡지사는 기본 4 페이지 인터뷰 기사가 나가면 월간지를 구매해 주셔야 합니다” “네? 몇 부나요?” “기본 000부는 사주셔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헐~”이란 탄식이 절로 나왔다. 돈을 받고 작가를 홍보해주는 월간지란 말인가. 지금까지 미술전문 잡지며 몇몇 월간지는 물론 TV인터뷰를 해봤어도 이런 황당한 ‘협찬’이란 단어는 듣지도, 보지도 못 했었다.

그리고 화가 났다. “이 월간지는 뭐야?” 아무리 ‘자기 PR 시대’라고는 하지만 모르겠다. 돈을 들이면서까지 이미 보여줬던 작품 몇 점을 홍보해야 하는지. 소위 협찬금으로 목판 1장 더 사고 물감에 투자해 더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 전시회에서 전문가·일반인들에게 평가 받기를 원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어떻게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언론이 불특정 다수에게 정보를 일시에 전달함으로써 가지는 큰 영향력을 잘 알기에 협찬을 해서라도 기사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잡지에 실린 모든 작가들이 다 ‘협찬’을 통해서 움직이지는 않았으리라 믿는다. 우리 작가들도 ‘저항정신’을 가졌으면 좋겠다.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아닌 것에 대해서 아니라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P사는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자 영어로도 번역돼 정부 각 부처는 물론 해외 대사관과 기업에도 나가고 있는 잡지로 알고 있다. ‘협찬’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어렵게 작품 활동하는 작가는 기업인들과는 입장이 다르다. 같은 인터뷰를 하더라도 돈을 잘 버는 기업인들에겐 소위 ‘협찬’을 받고 ‘어려운’ 예술가들에게는 이런 상처는 주지 않기를 감히 바란다.

잡지는 판매부수가 운영에 도움이 되겠지만 ‘돈 없는’ 작가에게 ‘협찬’ 명목으로 000부를 사라는 것은 지나친 부담이다. 협찬이 들어가면 아무래도 기사도 객관적이기 보다 ‘우호적일’ 개연성이 높다.

타협을 통한 사실의 왜곡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영을 위해, 자신의 홍보를 위해 이런 부분이 없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 또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과 타협을 한다. 하지만 타협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언론은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협찬 등으로 양심적으로 작품 생활을 하는 예술가들을 ‘유혹’하며 혼란으로 이끌지 말고 올바른 기사만을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었으면 좋겠다.

결국 협찬 제안에 불쾌감을 드러내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렇게 ‘언론’ 잡지에서까지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작가들을 ‘단절’시켜 버린다면 대한민국에서 많은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작업에 매진하는 작가들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돈으로 안되는 게 없다고 해도 예술인의 정신까지 살 수 있는 세상은 아니다. 덕분에 겨울 동안 쌓였던 작업실 먼지들 털어내고 이른 봄맞이 대청소를 했다 치고 웃어넘겼지만, 마음은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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