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마정(馬政)은 말을 사양하여 이를 군사·교통·통신·산업용 및 외교상 교역품으로 이용하였기에 그 수요가 많았다.
제주도 목장은 고려 말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나갔으나 국내 최대의 말 생산지로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다른 지방의 목장에 비해 여러 차례 개편과정을 거쳐 시행되었다.
그 조직 면에서 제주목사는 중앙조직과 전라관찰사의 지휘·감독을 받았으나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마정을 총괄하였다.
그리고 제주목사(濟州牧使:정3품)는 다른 지방과 다르게 태조때 만호(萬戶) 겸 목사(牧使), 세종때 도안무사 겸 판목사(都安撫使兼判牧使), 세조때 안무사 겸 감목사(安撫使兼監牧使), 단종 때는 안무사 겸 감목사(安撫使兼監牧使), 예종때부터 제주목사로 호칭하였으며 숙종때 이형상 목사(재임기간 1702~1703)는 제주도에서 馬政보다 더 중요한 업무는 없다고 하였다.
10소장의 설치와 운영
세종 11년부터 성종 대에 걸쳐 한라산 기슭 해발 200~600m(중산간 지대) 둘레를 10개로 나누어 소(所:마목장)를 설치하고 이를 다시 자목장(字牧場: 字屯場 : 場 : 馬에 낙인을 天·地·玄·黃 등 천자문순)으로 나누어 편성하였다.
제주마 마적(馬籍)은 태조 7년(1398)부터 5통을 작성하여 감목관, 제주목사, 전라도관찰사, 사복시, 병조에서 각각 한통씩 보관·관리했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제주마필의 이동사항을 투명하게 알 수 있었다.
조선 초기에 자목장에는 군두 1명, 군부 2명, 목자 4명이, 후기에는 동·서장으로 나누어 마감, 반둔감, 군두, 군부, 목자를 배치되었다.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목자(牧子)란 원래 원나라(몽골) 때 귀관(貴官)의 명칭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가장 천한 백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의(馬醫)는 마병의 예방 및 치료 업무를 담당하여 종6품~종9품으로 우대하였으나 임기가 1년인 관계로 부임하는데 3~4개월이 소요되어 실무를 담당하는 기간은 8개월에 불과하였으므로 본도 사람 중 수의(獸醫)소질이 있는 자를 교육시켜 담당토록 하였다.
제주목장(所:字牧場)수는 10소장(성종실록), 효종4년 이원진의 탐라지에 11소장·58자목장, 숙종 28년(1702) 탐라장계초에 15소(大所 4, 弟所 10, 無所 2, 別牧場 1) 63字場, 1703년에는 탐라순력도의 한라장촉에 10소장(소 5, 목장 5), 자목장 8 및 숙종 30년 남환박물에 63字場, 18세기 해동지도·제주삼현도(10소장·23자목장), 정조 4~13년(1780~1789) 제주읍지(10소장:제주목 1~6소장, 산마장, 우도장, 대정현 7~8소장, 모동장·가파도 별둔장, 정의현 9~10소장, 청마별둔장·흑우장), 헌종 4~9년(1839~1843) 이원조의 탐라지초본에는 숙종 30년 목사 송정규는 20소와 60둔목장을 우수한 목장 10개소로 통합하였다.
철종 12년(1861)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0소장), 고종 36년(1899) 제주도읍지(10소장) 등으로 보아 여러 차례 난립되어 운영된 것으로 본다.
제주읍지(1780~1789)에서 보면 6소장에 제주마가 1,314필, 10소장에 1131필로 많이 사육하였으나 면적(리:394m)은 9소장이 가장 넓은 반면 마필수는 510필, 면적이 가장 작은 대정현의 8소장은 362필로 국마목장에서 전체 7523필이 사육되었고 목자는 590명이었다.
조선시대 소ㆍ자목장(所ㆍ字牧場)
한라산 중산간에 10개소의 목장(소:마장)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1개 목장의 주위가 1식 반(45리)에서 2식(60리)이었고, 목장 안에는 환장(環場)과 사장(蛇場) 등을 갖추고 있었다.
환장은 말을 추합하고 수습시키기 위하여 원형으로 목책을 세워 만든 장소이며, 사장은 말 한 필씩 통과할 수 있게 만든 목책 통로인데 이를 통하여 점마(點馬)와 반출을 용이하게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완성된 10소장(마장)을 원목(元牧)이라 하는데, 이는 조선의 국영목장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 둔마(屯馬)를 자호(字號)로 낙인하여 자목장에 소속시킴으로써 목장 운영에 있어 새로운 편제로 발전되어 갔다.
효종 4년(1653) 무렵에 이르러서는 제주도 전체에 58개 목장, 즉 ‘11소(장)~58자(字) 둔(목)장’으로 편성되었다. 이 사실은 이원진의 ‘탐라지’에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는데, 제주목에 7소 38자 둔목장, 정의현 3소 17자 둔목장, 대정현에 1소 3자 둔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후 목장의 수는 6~7개정도 늘어났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것은 숙종 29년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와 한라장촉에는 10목장(所(5): 2소, 대 2소, 대 3소, 목 1소, 목 3소, 牧場(5): 별목장, 좌장, 산장, 침장, 원둔장, 字牧場(8): 황장, 현장, 측장, 일장, 진장, 우장, 별현장, 황장), 숙종 30년 남환박물에는 63자장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10소장 57자 목장이다. 이와 같이 난립된 목장을 송정규 목사때 10소장으로 재정비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제주도내 말 사육필수는 태조 7년(1398)에 4414필(牛 1914두), 세종11~16년(1429~1434)에는 1만 여필이었으나 죽은 말이 2300여필이었고 흠이 있고 체구가 작고 추쇄한 말이 3000여 필이며 수말(牡馬)이 실하지 않은 것은 마정(馬政)이 그만큼 미진했다. 그리고 세종 27~28년(1,445~1,446) 9792~9780필이 사육되고 있었으나 새끼를 낳은 말이 1160필, 손실 1990필이 된 것은 목양(牧養)에 마음을 쓰지 않은 까닭이며 다른 섬에서는 2만2406필, 唐(당)나라 70여만 필이 사육되고 있었다.
또한 중종 17년(1522) 특진관 고형산은 成宗朝의 馬籍을 고찰해보니 그 수효가 4만여 필이나 지금은 겨우 2만여 필이며 쓸 만한 말이나 진상하는 名馬가 없는 것은 마정(馬政)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못하고 흉년으로 점마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조 19년(1641) 김성구의 남천록(南遷錄)에는 도내 말 사육은 3만여 필이며 정의현은 2700여 필로 둔마(屯馬)가 많은데 천자문(千字文)중에 이(李)에서 화(火)까지 17자 글자마다 많으면 4·5백 필, 작으면 1·2백 필로 목자가 휘파람을 불면서 말을 몰게 되면 그 줄에 들어서서 조금도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으므로 이곳이 양마(養馬)하는데 가장 좋은 땅이라고 하였다.
효종 4년(1653)에 이원진의 耽羅志에는 3읍을 합하면 11場 58字이며 말 필수는 합계 1만185필로 기록되어 있다.
한라장촉은 탐라순력도(이형상, 숙종 28년)에 그려진 지도로 한라산 기슭의 선은 하잣과 산장의 선잣이며 남환박물의 大牧場인 所牧場과 천자문의 글자를 딴 字牧場인 小牧場 및 제주도가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24방위에 주변 지역과의 방향·위치 등 남해안의 여러 섬,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를 배치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제주마사 다음호에 계속)
장 덕 지 교수
제주산업정보대학 관광생명자원과
(제주마문화연구소장·제주도문화재위원·제주마주협회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