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정의에 열성적이다. 명분을 중시하는 유학(儒學)의 영향 아래 오랫동안 살아온 영향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렇다. 그리고 정의를 추구하는 만큼 올곧다.
2014년 한 외국인이 우리의 이러한 기질적 특성에 불을 붙인다. 그가 던진 질문은 간명하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의 4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 200만부 넘게 팔렸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일까? 한 강연에서 샌델은 질문한다. “당신이 시속 100km로 폭주하는 전차의 기관사이고 저 앞에 작업자 다섯 명이 전차가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일을 하고 있다. 당신은 전차를 멈추려 해보지만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는다. 이때 당신은 오른쪽으로 갈라져 나간 철로를 발견한다. 그쪽에는 작업자가 단 한 명! 전차를 몰고 그 철로로 들어서면 작업자 한 사람이 죽는 대신 다섯 사람이 살 수 있다. 당신은 그렇게 할 것인가?”
질문을 바꿔본다.“당신은 큰 공사의 계약담당이다. 공사시행 업체에서 선급금을 요구하지만, 지급에 필요한 요건을 충족하지 못 했다. 요건은 내일이면 충족되지만, 요건이 안 되는 것을 알면서 선급금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사정이 긴박하다. 오늘 돈을 주지 않으면 업체는 도산한다. 당신은 선급금을 지급해 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궁색하다. 하지만 명확한 것은 질문에 마주하는 입장에 따라 대답이 바뀐다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서 나는 한 명의 죽음을 택하겠다. 철도회사 직원으로서의 판단도 같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에서는 자연인으로서의 정의와 직업인으로서의 청렴윤리가 상충한다.
내가 청렴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누구라도 그러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일까?
조직의 가치와 개인의 가치를 일치시키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러나 개인이 정의롭지 않으면 그러한 고민의 필요성도 없어진다. 위의 질문들도 개인이 정의롭다는 가정 하에서 이뤄진 것이다.
청렴! 청렴! 여기저기서 귀가 따갑다. 청렴을 말하기 전에 먼저 정의로워지자고 불의에 참지 않는 훌륭한 인간이 되라고 이야기 해보면 어떨까? 사람이 올곧으면 조직의 청렴도 바로 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