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의 속살에 흠뻑 취한 이가 돌아갈 생각을 잃고 풍광을 바위에 글로 새긴다. 그 가운데 산 속 어딘가에는 신선이 숨어있을 것만 같아 ‘은선동’(신선이 숨어사는 골짜기)이라는 명시를 바위에 남겼다.
인간은 자신의 삶과 감정을 기억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록하고 새겼다. 그것이 절벽이나 바위, 벼랑이라도 상관없이.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한라산연구원이 ‘신선산’(神仙山)이라 불려온 한라산의 백록담과 탐라계곡 내에 새겨진 마애명(磨崖銘) 탁본자료 전시회를 13일 시작했다.
마애석각문이라고도 불리는 마애명은 경승지의 바위나 벼랑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말한다.
백록담 내에서도 동벽과 북벽에서 주로 발견되며, 주요 등산로였던 한천 상류인 탐라계곡은 물론 제주섬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전시된 마애명 탁본을 보면 제주에 부임해온 목사나 유배인 또는 제주유림들이 한라산을 오르며 느낀 감탄을 수려하게 때로는 솔직하게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백록담 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김정의 ‘제주풍토록’(1520년)과 탐라계곡에 웅장한 행서체 필체로 남겨져 있는 ‘은선동’ 등 탁본자료 30여점을 실제사진과 함께 볼 수 있다.
연구원은 인물들의 풍류의식과 역사적 행적을 쫓는 향토사적 의미에서 마애명의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연구원 관계자는 “이번 전시회로 많은 탐방객들과 자연현상으로 인해 붕괴 위험에 처한 마애명이 소중한 문화적 가치를 품고 있는 유산임을 일깨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회는 다음달 15일까지 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문의=064-710-8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