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0”
“응답하라! 1980”
  • 이종일
  • 승인 2016.0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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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민 간 고교동창 ‘은규’
35년만에 귀국 즐거운 추억 여행
타임머신 타고 ‘질풍노도’ 시절로

물질은 부족해도 이웃이 있었다
돌아보는 삶의 계획도 세우자
기억 쇠하면 추억도 만나지 못할 터

‘데이비드 정’은 미국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다. 그의 한국 이름은 ‘정은규’다. ‘은규’는 필자의 고교동창이다. 1980년인가 그는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이민을 떠났다. 낯선 이국땅에서 열심히 살아 아이 넷을 낳아 기르며 일가를 이뤘다.

그동안 우리 동창들은 그를 만나지 못했고 소식도 잘 듣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밴드’라는 SNS를 통해 동창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동창들은 그의 그리움에 동참했고 이윽고 그는 아내의 ‘재가’를 얻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35년 전으로 거슬러 왔다. 오로지 친구들을 만나는 일정만으로 지난해 말 3주간의 시간을 내어 고국 땅을 밟았고 고교 동기와 선배들을 만났다. 실로 35년만에.

교련복 바지를 나팔바지로 개조해 입으며 한껏 멋을 부렸던 ‘은규’는 멋진 수염을 장착한 중후한 중년이 돼 나타났다. 동창들은 마치 옛 ‘전우’를 맞이하듯 반겼고 바쁜 생업도 뒤로 한 채 그의 체류 일정을 짜고 순번을 정해 동행했다.

고등학교 동문 동아리 선후배간 1박2일 송년회를 마련해 오랜만에 회포도 풀며 잊었던 추억을 챙겼다. 모교 야구경기장도 찾아 목청껏 응원가를 부르며 청춘을 그리워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친구 핑계로 제주도 여행도 ‘감행’해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자유도 만끽했다.

추억을 찾아 친구를 찾은 그는 더 많은 추억을 만들어 갖고 돌아갔다. 떠날 때는 올 때보다 한층 야윈 얼굴이 됐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였고 웃음이 가득했다. 나머지 동창들도 35년 전의 정감어린 추억여행을 마치고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갔다.

3주간 그는 타임머신을 타고 질풍노도의 시절로 돌아가 자신을 만났다. 그 시절의 자신을 만나 무슨 얘길 나누고 무엇을 느꼈을까? 그 때가 좋았다고? 그립다고 했을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느꼈을까? 아마도 낯선 외지로 떠나는 열일곱의 까까머리 소년에게 걱정 말라고, 잘 될 거라고 위안하며 항상 그리울 거라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아내도 만났고 듬직한 아들 셋에 귀여운 딸을 낳아 기르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안심시키지 않았을까.

텔레비전 드라마를 좀처럼 보지 않던 내가 요즘 챙겨보는 드라마가 있다. ‘응답하라 1988’이다. 이 드라마는 1988년 서울의 쌍문동을 배경으로 서민들이 옹기종기모여 이웃 간의 정을 나누며 사는 일상을 다룬다. 그 시절의 생활, 문화, 정서가 흠뻑 배어 있는 이 드라마는 제법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이제 고등학생인 딸아이도 즐겨 보기에 신기해서 물어봤다. 그 시절을 살지 않았고 겪지도 않았는데 무엇이 공감되고 재미있는지. 그 때의 유행이나 문화는 알 수 없으나 이웃 간의 교류와 소통의 진정성이 놀랍고 신기하단다.

그리곤 물어본다. 정말 저렇게 지냈냐고? 그러면서 정말 재미있었겠다고. 자신은 커서 별로 추억할 게 없을 것 같다고. 딸아이의 소감이 충격적이었다. 친구들은 입시 공부에 매달려 학원에 모여 있고, 이웃은 겹겹이 벽으로 막혀 지내는 요즘 아이들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질적 풍요는 좀 더 누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부딪침과 배려 속에 사랑과 우정을 직접 재배하며 살았던 1980년대의 아이들이 더 행복했을지 모른다. 성장위주의 사회가 미처 동반하지 못한 의미와 정서는 복원 될 수 있을까? 이웃은 없고 가족만 중요하고 결국 나만 남는 건 아닐까?

어김없이 새해가 밝았다. 모두들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고 각오를 다진다. 계획은 대부분 미래적이다. 소망을 담았고 바람을 실었다. 더 이루고 더 갖고 더 누리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이제 더 늦기 전에 돌아보는 삶을 사는 계획을 세워야겠다. 기억이 쇠하고 움직이기 힘들어지면 추억하지도 만나지도 못 할 터인데 부지런히 기억하고 마주해야겠다는 계획을 말이다.

오늘 밴드에 새 글이 올랐다. 동창 모임을 홀수 달에 정기모임을 갖자는 영원한 총무 ‘선기’의 제안이다. 점심 후 들어가 보니 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다. 벌써 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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