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제주대학병원서 문화행사
조선시대 ‘이아’에 자혜의원 자리
문화예술 공간 탄생 위한 시도
그 곳 벽 채워 놓은 동백 목판화
자존심 강한 여인 같은 꽃
버려야 채울 수 있다는 교훈도
도시는 시간과 함께 한다. 그 흐름에 따라 성장하기도 하고, 어느 순간 성장을 멈추고 쇠퇴하기도 한다. 야속한 인간들의 욕심과 ‘변심’ 때문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특정 지역은 지도자의 뜻 또는 인간들의 욕구가 중첩되면서 발전을 거듭한다.
그러다 무슨 이유로든 ‘관심’이 줄어들면 발전을 멈춰 쇠퇴하기 십상이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이 그러할 것이고, 제주시의 구(원)도심도 이러한 사례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제주시는 1970년대 후반부터 도시 발전에 절대적인 택지개발 사업이 경제적 논리에 따라 기존 도심이 아닌 신제주 등 주변에서 이뤄졌다. 그래서 규모 면에서 제주시는 전체적으로 성장하기는 했지만 초기 도심의 중심지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도심이 ‘도시’ 기능을 수행하게 되면서 기존 도심에는 심각한 공동화 현상이 일어났다. 이에 구도심 활성화 방안은 과거는 물론 현재의 제주도정에도 중요한 화두로 자리하면서 많은 전문가들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제주시 구도심 중심, 아주 의미가 깊은 곳에서 뜻 있는 기획전시가 이뤄졌다. 장소는 옛 제주대학병원 자리로 제주의료역사 100년을 담고 있는 곳이다. 600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그곳은 조선시대 관덕정과 더불어 제주행정의 중심부였으며 판관의 집무처였던 이아(貳衙)의 터이기도 했다. 자혜의원을 거쳐 해방 이후 도립병원에 이어 제주대학병원이 들어서 의료봉사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러다 2009년 제주대학병원이 아라동으로 이전하면서 건물은 사실상 빈 공간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옛 추억의 영혼들이 멈춰있던 기억의 그곳에서 ‘굿 한판’이 벌어졌다. 지난달 기억의 공간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새롭게 탄생시키기 위한 첫 시도로 열린 ‘파일럿 프로그램-터와 길’ 전이 그것이다.
과거의 터에서 미래의 길을 찾고자 필자도 비어있는 거친 공간의 한 벽을 ‘동백꽃 물들다’ 제목의 목판화로 채웠다. 늦겨울에 붉은 꽃을 터트리며 봄을 알렸던 이아(貳衙)의 주변 동백 숲은 그렇게 모두에게 잊혀져 아련한 기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잊혀진 동백을 한순간 만이라도 되살려 보려는 소망으로 차가운 하얀 벽면을 동백꽃으로 붉게 물들여 봤다.
모든 수식어를 떠나서 동백은 꽃을 피우고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깨끗함을 간직하고 스스로 꽃을 떨어뜨려 정리하는 지혜로운 아름다움이 있다. 그래서 동백꽃을 자존심 강한 여인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이렇게 꽃을 떨어뜨려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동백나무. 마치 버려야 채울 수 있다는 철학적인 의미를 담아 우리 인간들에게 암묵적인 깨우침을 주기도 한다. 동백이 꽃을 떨어뜨리고 씨앗을 달고 있는 모습도 유심히 보고 있자면 또 하나의 아름다움이 있다. 불가에서는 인생무상을 의미한다해 사찰 경내에 심어 가꾸기도 한다.
한겨울에도 윤기를 내고 초록을 과시하며 겨울을 이겨내는 녹색 잎과 어우러진 빨간 동백꽃.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꽃말을 누군가의 귓가에 속삭이고 싶은 크리스마스에 더없이 어울리는 꽃이 아닌가 싶다. 요즘처럼 머릿결에 좋다는 각종 에센스가 쏟아지는 시대에 와서 각광을 받지는 못하지만 어릴 적 멋쟁이 우리 아버지가 동백씨 기름을 머릿기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또 하나의 기억은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제목 그대로 그 빨간 동백꽃이라고 한 치의 의심 없이 믿고 있었다.
김유정의 ‘동백꽃’은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빨간 꽃이 아니었다. 봄을 알리며 노랗게 피기 시작하는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었다. 생강 냄새가 나는 생강나무를 강원도에서는 동박나무(동백나무)라고 부른다고 한다.
겨울 같지 않은 날씨 속에 비만 계속 내리더니 오늘은 유수암에 함박눈이 내린다. 2016년에는 우리 모두가 필 때 못지않게 질 때도 아름다운 동백꽃처럼 ‘한결같은’ 마음의 한 송이 동백꽃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겨울에 피기 시작해 이른 봄까지 우리내 마음을 따뜻하게 가득 채워주는 꽃, 유수암에도 붉은 동백꽃 봉오리가 앙증맞게 맺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