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0시 22분 서거했다. 향년 88세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정치사에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는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최연소로 당선됐고 이를 포함, 5대에서 14대 국회까지 총 9선의 최다선 의원이 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 군사정권에 의해 제명당한 것도 첫 사례였고 독재에 항거 23일간 단식투쟁한 것도 새 기록이었다. 정신적으로 감옥생활보다도 더 힘들었다던 3년 가택연금 또한 기록적이다.
특히 군사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던 노태우 정권 시절 그는 야합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당 합당을 한 것도 헌정사상 처음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그의 3당 합당의 변(辯)이 과연 옳았는지의 판단은 앞으로 국사학자의 몫이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의 큰 업적들은 이러한 기록이 아니다. 그 위대성은 그의 호(號)가 상징하듯 한국 현대 정치사의 거산(巨山)이었다는 데 있다.
그가 평생을 통해 대한민국에 바친 가장 큰 공은, 동지요 경쟁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벌였던 민주화를 위한 반(反)군사독재 투쟁이다. 김영삼-김대중 두 전직대통령의 조국 민주화를 위한 반군사독재 투쟁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고(故)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든 정치적 기록들도 반군사독재 민주화 투쟁에서 나온 소산(所産)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큰 산(巨山)’으로서의 치적은 반독재 민주화 투사답게 집권 후에도 빛을 발했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군사정권의 연결고리였던 군 내부의 파벌 ‘하나회’를 해산시켰고, 부패 고리를 원천적으로 끊기 위해 공직자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를 감행했다. 5.18특별법을 제정해 신군부(新軍部)였던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사법처리했다. 그가 문민정부를 출범시키면서 구상한 ‘제2의 건국’은 실천 단계부터 혁명적이었다. 정계의 큰 산(巨山)이 아니고는 이루기 힘든 혁파였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막지 못해 국가부도위기를 불러 왔고, 아들 관리를 소홀히 해 구속되는 오점을 남겼다. 권력에는 영욕(榮辱)이 함께 한다더니 정계의 큰산(巨山)도 이를 피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서슬 퍼런 독재 앞에 “닭의 목을 비뚤어도 새벽은 온다”던 거산(居山)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바로 새벽이 열려 닭이 우는 그 새벽녘에 영원한 길을 떠났다. “큰 길에는 문이 없다(大道無門)”더니 인생의 저승길에는 문이 있었나 보다. 삼가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