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 예술가 2명의 다큐 시청
“매 순간 온 힘을 다 해서 살자”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행동하는 평화주의자 존 바에즈
민주국가 시민의 책임의식 생각
지금도 ‘고통’ 있는 곳 인류애 전달
최근 유명한 2명의 여성 예술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잉그리드 버그만과 존 바에즈다.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1915. 8. 29~1982. 8. 29)이 영화배우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는 아직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희미하게 ‘잔다르크’나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정도를 기억하고 있는데, 그 영화들이 40년대 후반 영화인걸 보면 아마 어릴 적 TV 명화극장에서 봤을 듯하다.
그녀가 스웨덴 출신이었다는 것도, 3살에 엄마를 병으로 잃었고 늘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며 딸을 애지중지 키운 아버지도 그 12년 후 암으로 죽었다는 것도, 어려서 부모를 잃어 내성적이었고 그 때문인지 언제든 추억과 함께 하기위해 뭐든 모아두었다는 것도, 아버지의 영향인지 기억을 붙잡기 위해서인지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홈무비를 만들었다는 것도… 일기와 편지와 영상들이 남겨져 있어서인지 이 다큐멘터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풍부한 자료로 한 유명 여성 연기자의 삶을 차곡차곡 잘 담아내고 있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수줍음 많은 사람이지만 내 안의 사자는 끊임없이 으르렁댔다”는 24세 때 일기처럼 너무도 당당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열정적인 연기와 사랑으로 채워나간 삶을 살았다. 스웨덴에서 태어나 미국·이탈리아·프랑스·영국에서 연기 생활을 했고, 영화가 갖는 사회적 영향력과 예술성에 눈을 떴다.
3번이나 결혼을 할 만큼 사랑에도 늘 솔직했다. 2번째 남편이 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과의 연애와 결혼으로 인기 상종인 할리우드 연기자가 하루아침에 마녀사냥의 제물이 됐다. 사랑과 새로운 연기를 위해 과감히 가족과 안정된 연기 환경을 떠나는 자유로움과 당당함을 지닌 영혼이었다. “미국 상원의원·언론·성직자 그 누구든 나 이외에 내 삶의 방식을 결정할 순 없다”며 “매 순간 온 힘을 다 해서 살자”는 어릴 적 그녀의 다짐은 평생 암으로 눈 감을 때까지 지속됐다.
존 바에즈(Joan Chandos Baez·1941. 1. 9~ )는 평화운동, 인종차별반대운동 등 인류애를 예술 활동으로 끊임없이 실천하고 있는 포크송 가수다. 노래를 좋아한 큰 오빠 덕에 내게도 초등학생 때부터 익숙한 목소리의 가수다.
물리학자인 아버지의 평화에 대한 신념을 어려서부터 익혀온 존 바에즈의 가수 인생 역시 다큐멘터리 속에서 감동으로 다가왔다. 포크 가수이기 이전에 인간이며 반전주의자라고 당당히 밝히는 그녀. 인종차별이 여전히 극심한 1960년대에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테러로 진압하는 정부에 대해 마틴 루터 킹·밥 딜런 등과 함께 강력히 항의하며 흑인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행동했다.
폭탄이 떨어지는 베트남에도 직접 날아가 그 폭력의 두려움을 직접 겪으며 “나도 그들이 당하는 폭격에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국사교과서 국정화·4대강 개발·세월호·청년실업 등 헬조선과 제주도 난개발 등의 국내 문제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테러와 환경재앙 등을 겪으면서 군주제도 아니고 정부 지도자를 직접 선출하는 민주국가 시민이라면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이 있다는 의미로 되새겨진다.
존 바에즈는 칠레의 산티아고, 태국의 난민수용소, 내전 중인 사라예보 등 억압과 고통 그리고 폭력이 있는 곳을 찾아 평화와 인류애를 음악으로 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가볍고 멋진 노래들을 좋아하지만 뭔가 의미 있는 노래들은 깊은 상처에서 나온다”는 그녀에게서 인기보다 진지한 삶을 추구하는, 그래서 주름진 노년에도 더욱 아름다운 가수의 모습을 보았다.
지난 10여 년간 전시 공간을 운영 했던 사진들을 쭉 정리해볼 일이 생겼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다큐멘터리로 최근 만난 이 두 여성 예술가들의 삶이 주는 감동을 되새겨봤다. 내 삶에도 기억할만한 일이 있는지, 혼신을 다했는지, 그 일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도 의미가 있는지, 그 의미가 얼마 동안이나 유효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