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산가족 현재 진행형인 고통
65년만에 고작 이틀의 만남
이념과 권력의 희생양들
‘재회’ 정치적 이벤트여선 안돼
이념·사상 아닌 인간의 도리
남은 삶이라도 나눌 수 있게 해야
가을이 성큼성큼 지나가고 있다. 바람이 떨어진 낙엽을 일으켜세워 데려 간다. 한 조각 남은 햇볕에 발걸음을 서성이다 찬바람을 피해 얼른 문을 닫는다. 가을이 매정하게 떠나고 나면 모진 겨울이 내려앉아 쉽사리 떠나질 않을 게다. 그 모진 겨울 언덕을 기다림으로 바라보며 예순다섯 해를 넘긴 여인이 한음전 할머니다. 할머니는 며칠 전 이뤄졌던 남북이산가족 상봉에서 65년 만에 남편을 만났다.
1983년 6월30일 밤, 가수 패티김의 애절한 목소리로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노래가 TV에서 흘러 나왔다. KBS가 특별 생방송으로 기획한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의 시작이었다. 당초 이 프로그램은 3시간 방영 예정 이였으나 상상을 초월하는 반향을 불러일으켜 그해 11월4일까지 장장 453시간45분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많은 국민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함께 울고 웃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나마 왕래가 자유로운 남한 땅에 살고 있는 가족들의 만남이었고 남북으로 헤어진 가족들은 생사조차 일 길이 없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해 1985년 고향방문단이 이뤄져 지금까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어지고 있다.
한음전 할머니의 남편은 뱃속에 핏덩이를 남겨둔 채 사진 1장 안남기고 떠나 86세의 노구가 돼 나타났다. 여자는 3개월 뒤 아들을 낳아 홀로 기르며 재혼도 하지 않았다. 남자와의 재회를 꿈꾸며 그 긴 세월을 기다리며 버텼다. 그 절절한 그리움 끝에 단 이틀을 마주하고 돌아서야하는 여자는 이제 무엇을 그리며 살 수 있을까? 더 이상 기다려봐야 소용없다는 절망을 확인하고 돌아간 여자는 이제 더 이상 눈 쌓인 언덕을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1914년 충주 태생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해주던 유복한 집안의 딸로 태어난 여자는 얼마 전 백수를 넘겨 세상을 떠났다. 부친이 자금을 대주던 독립군의 집안과 사돈을 맺고 시집을 보냈다. 시집와 아들 넷을 낳고 기르며 6·25 전쟁에 떠난 남편을 그리며 자식들을 기른 여자의 이름은 이일화다. 이일화 할머니는 필자의 친조모로 물리적으론 장수하셨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부패한 정부와 독재정권을 지나 자본주의와 민주화를 모두 지켜보는 긴 여정을 겪었다. 그동안 할머니는 그 어떤 정치적 사건이나 이념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아니 관심도 없었다. 다만 홀로 네 아들을 키우며 하루하루를 견뎠을 뿐이다.
할머니는 무엇을 기다리며 버티셨을까? 이제 할머니는 65년 만에 저승에서 남편과 상봉하셨을 것이다. 남편 곁으로 돌아간 할머니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그리움에 몸서리치지 않을 것이다.
어찌 이 두 분뿐이겠는가? 우리 주변에는 이 같은 사연을 품고 견뎌온 여인들이 수두룩하다. 이 땅의 여자로 태어난 죄로 한 평생 희생하며 살아온 어머니, 할머니들이야 말로 이 땅의 들녘이다. 겨우내 언 땅을 녹여 푸르게 물들이고 열매 맺게 해, 먹이고 입히는 들녘인 것이다.
이념에 무심했고 관여치 않은 삶이 이념을 등에 진 권력의 희생양으로 살아야하는 엄청난 모순에 살았다. 사랑하는 남편을 평생 그리며 기다렸고 보석 같은 자식을 앞세우면서도 생색내지 못하고 인내하며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보자! 결국 이념은 권력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요 수단인 것이다. 그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이념의 벽 안에 갇혀있다.
남북이산가족의 재회가 정치적 이벤트로 반복돼서는 안 된다. 최소한의 남은 삶이라도 같이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배려도 아니고 혜택도 아니다. 이념도 아니고 사상도 아니다. 인간의 도리이며 권리이고 자연이다. 이념과 사상의 옷을 입은 자들은 언제까지 도리와 자연을 거스르고 한줌 권력을 향해 역주행할 것인가.
추수를 끝낸 가을 들녘이 텅 비어있다. 새들이 가끔 내려와 이삭을 줍는다. 그 위로 노을이 물들고 있다. 곧 저 들녘에도 눈이 덮여 동면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매서운 겨울을 기다림으로 버티며 어느덧 눈을 녹이고 들녘은 싹을 올릴 것이다. 결코 들녘은 잠들지 않는다. 세상이 모두 잠들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