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향군회원 1000만명 돌파
최대 안보단체 역할 확실히 수행
오늘 10월 8일은 제63주년 재향군의 날이다. 재향군인회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 ‘내조국은 내가 지킨다’는 우국충정의 기치아래 전시 수도인 부산에서 창설됐다. 63주년을 맞는 동안 국내 최대 안보 단체로서의 안보 길잡이 역할을 해오고 있다.
향군은 13개 시·도회, 220개 시·군·구회, 3288개 읍·면·동회와 미국·영국 등 22개 해외 지회를 두고 있다. 그동안 향군회원은 지속적으로 증가, 1970년대 200만명에서 2014년 1월에 이르러 1000만 회원에 돌파했다. 이는 창군 이후 군문을 나선 예비역들이 1000만명을 넘었다는 단순 숫자를 떠나 국가발전과 분단국 안보를 위한 예비역의 책무가 그만큼 더 크게 다가서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향군을 주축으로 창설된 향토예비군은 1968년10월 북한의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으로부터 강릉잠수함사건 등 전국 각지에 침투한 간첩과 무장 공비를 섬멸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75년4월말 월남이 패망하고 크메르와 라오스가 잇따라 공산화됨에 따라 ‘총력안보국민협의회’를 결성한 후 전개한 향군 총력안보활동은 1979년 카터 대통령이 한시적인 주한미군 철수중지 결정을 하는데 역할을 했다.
향군은 1974년 ‘참전용사 유치위원회’를 구상하고 한국전 참전용사 재방한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 1980년부터 시작한 재방한 초청사업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지지기반 확산과 외교안보강화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다.
1987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민주화 와중에서 좌경용공세력들의 발호를 막기도 했다. 당시 향군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 전국의 예비군·민방위대원·각급 단체원·학생·주민을 대상으로 계도활동 등 종북세력 척결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향군은 2000년 10월 영천호국원 용사묘지를 완공하고 2001년 11월 임실호국용사묘지 준공하여 국립호국원으로 개칭, 국립묘지화하고 보훈처에 관리를 전환한 바 있다. 이어 2008년 이천 및 2015년 산청 국립호국원을 준공한 바 있다.
2007년 2월 한·미국방장관이 2012년4월17일 전작권 전환과 한·미연합사 해체를 합의함에 따라 향군은 “전작권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권의 문제”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많은 애국단체들과 함께 강력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전작권 환수 논의 중단 촉구 범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한 후 서명운동을 전개, 2010년5월26일 전작권 전환과 한·미연합사해체 반대하는 1000만명 서명목표를 달성하여 한·미대통령이 2015년12월까지 3년7개월 연기하기로 합의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2014년 10월 한·미 양국이 전작권 전환과 한·미연합사 해체를 사실상 무기한 합의하기까지 향군은 국민 여론을 결집시키는데 선도 역할을 다했다.
향군은 지난 63년 동안 국가발전과 국가 안보를 위해 혼신의 역량을 쏟아 부었다. 향군이라는 안보 단체가 없었다면 1960년대나 1980년대까지 집중적으로 전개된 북한의 무력도발로부터 국민들은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국가경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90년대의 국가보안법 개폐 및 전작권 전환 역시 향군이라는 조직이 없었다면 남북관계가 새로운 형태로 전개 됐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감안 한다면 향군의 지속적이고 강력한 반대운동으로 전개된 전작권 전환이 연기된 것은 그 의미가 크다할 것이다.
이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 소득 2만달러 인구 5000만을 동시에 충족하는 ‘20=50’ 클럽에 세계에서 7번째로 가입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국가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은 향군의 활동과 역할은 역사에서 평가될 것이다. 이에 향군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를 극복하는 한반도 통일을 선도하는 역할이 기대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