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께서 당분간 피해 있으라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 명절 때만 되면 고향에 두고 온 가족 생각이 많이 나···.”
황해남도 벽성군이 고향인 박연상(82·제주시 동문로) 할아버지는 요즘 따라 북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 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깊어지는 주름만큼 고향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나날이 깊어지고 있다. 살아 생전에 그리운 고향 땅을 밟아보는 것이 소원이지만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른 철조망은 언제 걷힐 지 알 수 없다.
8남매 중 넷째인 박 할아버지는 6·25 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1·4후퇴 때 당분간 피해 있으라는 아버지의 말에 형의 손에 이끌려 남하했다. 그의 나이 고작 19살 때였다.
박 할아버지는 “아버지께서 누나와 어린 동생들이 피란길에 오르는 것이 힘들 것이라고 판단해 나와 형만 먼저 남으로 내려가 있으라고 했다”고 말했다.
당시 박 할아버지는 야산에 숨어 있다가 무인도로 들어갔다. 마실 것, 먹을 것조차 하나 없던 그 곳에서 8개월이나 살았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섬 밖으로 나가 음식을 구해와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이후 박 할아버지는 인천 월미도 미군 헌병 부대에서 잡무를 했다. 될 수 있으면 고향에서 가까운 곳에 머물기 위해서였다.
박 할아버지는 “당시 친구 한 명이 위험을 무릅쓰고 가족을 만나기 위해 북으로 갔는데 아버지께서 친구를 통해 나에게 돈을 보내준 게 생각난다”고 회상했다.
그 이후로 가족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박 할아버지는 형과 함께 충청남도 공주시로 내려와 천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며 기술을 익힌 뒤 26살 때 매형을 따라서 제주로 왔다.
제주에서 결혼까지 하며 세 자녀를 둔 박 할아버지는 머지 않아 통일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왔다. 하지만 막연한 희망이었을까. 통일로 향하는 길은 아득하게 멀기만 한 것이 현실이었다.
박 할아버지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따로 하지 않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였다.
집안 형편도 넉넉지 않은 탓에 북에 있는 동생들에게 선물을 건네기 어려운 상황인 점도 적잖이 영향을 미쳤다. 박 할아버지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어리광 부리던 동생들의 모습이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그는 “동생들을 만나게 되면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부모님은 언제 돌아가셨는지 등을 물어보고 싶다”며 “비록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동생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대한적십자사 제주도지사에 따르면 현재 제주에서 북에 있는 가족과의 만남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지난달 기준으로 540명에 달한다.
남북은 지난 15일 판문점에서 이산가족 생사 확인 의뢰서를 교환했다. 명단에 담긴 이산가족은 남측이 250명, 북측이 200명이다.
제주에 거주하는 이산가족 1명이 이산가족 상봉 후보자 250명에 포함됐다. 또 북한에 사는 제주 출신 7명도 상봉 후보자 200명 명단에 올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남과 북은 이산가족의 생사와 주소를 확인한 후 다음 달 5일 회보서를 주고 받고 8일 최종 명단을 확정, 교환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