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몽항전 삼별초의 마지막 보루 '항몽로·항파두리로'

학창시절 현장학습으로 제주시 애월읍 상귀리에 위치한 항파두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초~고등학교를 거쳐 3번 이상은 갔던 것 같다. 하지만 10여년이 흐른 현재, 항파두리와 관련 세미나를 앞두고 혼선이 왔다. 분명 여러 번 갔던 곳이지만, 이곳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파두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지금. 도로명 주소인 ‘항몽로’, ‘항파두리로’와 이 곳을 연결시켜 소개하고자 한다.
▲항파두리 유물 다수 발견
항몽로(약6032m)는 고려시대 원나라의 침입에 맞서 삼별초가 최후까지 항쟁을 벌인 항몽유적지가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항몽로에서 서쪽으로 갈라지는 항파두리로(약 1751m)는 삼별초가 쌓았던 항파두리성을 의미한다. 항파두성과 항바두리라고도 불리는 항파두리는 13세기 말 강화도에서 진도로, 다시 제주도로 건너와 원나라에 저항한 삼별초의 마지막 보루였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 대부분을 정복한 원나라는 1231년부터 30여년간 7회에 거쳐 고려를 침략했다. 이에 조정은 강화도를 임시왕도로 정하고, 국력의 수십배나 되는 강대한 침략군을 상대로 끝까지 고려를 지키고자 대몽항전을 결의했다. 중심 군사였던 삼별초는 전라남도 진도를 근거지로 원나라와 싸웠지만, 끝내 이 곳을 내주고 말았다. 이에 1271년 김통정 장군을 필두로 남아있는 병력이 제주로 들어오게 됐다. 삼별초군은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고 항전하면서 기세를 올렸으나, 1273년 1만2000여명에 달하는 여-몽 연합군의 총공격을 받았다. 결국 항파두리는 함락됐고, 삼별초 군사들은 전원 순의하고 말았다. 정부는 원나라와 맞서 끝까지 항쟁을 벌인 고려인들의 드높은 기상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 지난 1997년 이 곳을 사적 제396호로 지정했다.

항파두리에는 당시에 쌓았던 토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돌쩌귀와 기와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현재 군사들이 훈련 때 과녁으로 사용했던 살맞은 돌, 김통정 장군이 성 위에서 뛰어내린 발자국이 파여서 샘이 솟는다는 장수물을 볼 수 있다. 또한 군사들이 급수로 이용한 옹성물과 구시물 등도 남아있다.
최근에는 항파두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된 바 있다. 제주고고학연구소 강창화 소장은 지난 7월 고려시대 삼별초군의 대몽항쟁 근거지였던 제주 항파두리를 비롯해 강화도 고려도성, 진도 용장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당시 강 소장은 “삼별초는 제주와 강화, 진도에 본거지를 두고 세계 최강 군사력을 지닌 원나라와의 전투에서 최후까지 항쟁하며 고려의 기개를 세계에 알렸다”며“이는 한국~일본~몽골을 잇는 세계문화유산 등재 연구로 확대하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항파두리는 지난 7월부터 문화관광 활성화 차원에서 무료 관람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한편 항파두리에 거의 도착하면, 예쁜 꽃밭들이 조성돼 있다. 꽃밭에서 웨딩 사진도 많이 찍는 등,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항파두리를 지나면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어진다.

광석동서 1914년 행정개편으로 현재 지명 사용
▲애월읍 상귀리 유래
1238년 고씨에 의해 처음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상귀리는, 1680년 하귀리와 상귀리로 분리됐다. 그러다 1884년 고성리가 상귀리에서 또 다시 나눠졌다. 상귀리는 광석동, 광석 등이라 불리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귀리가 됐다. 상귀리의 주요 농산물은 감귤이다. 감귤 외에도 시금치, 상추 등 채소 재배도 활발히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귀리에는 조선 시대 방사탑인 ‘상귀리 탑’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잡석을 이용해 탑을 쌓고, 그 위에 새나 사람 등의 형상을 올려 놓은 것이다. 이 탑에 알려진 것은 없으나, 지금은 사라진 마을인 상귀리 불수동 사람들이 축조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상귀리 방사탑은 이 일대 길을 넓히면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