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서 발생한 ‘초등생 삭발사건’
학교·학생 대립 없이 합리적 해결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저력’확인
구성지 의장 “허물 있으면 고쳐야”
의회·집행부 모두 견지할 태도
孔子의 ‘과즉물탄개’의미 되새길 때
지난해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콜로라도주 캡록 아카데미(초등학교) 학생인 캠린 린프로(9)는 어느 날 삭발(削髮)을 한 채 등교했다. 소아암에 걸려 머리를 빡빡 깎은 친구 딜래니 클레멘츠를 격려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린프로의 부모도 딸이 친구를 위해 삭발을 하겠다고 하자 선뜻 동의하고 칭찬까지 해줬다.
하지만 이를 알지 못했던 학교 측은 ‘산만한 분위기를 방지하기 위해 삭발한 학생은 교실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규정을 어겼다며 교실 입장을 불허하는 정학 처분을 내렸다. 할 수 없이 린프로는 학교 근처 공원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어린 딸이 수업을 받지 못하는 정학(停學) 처분에 린프로의 어머니는 페이스북에 이런 사정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친구인 클레멘츠와 똑같이 머리를 빡빡 밀어 함께 찍은 사진도 공개했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인터넷상에선 학교를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학교 측이 즉각 운영위원회를 열어 정학 처분을 유예하며 이 사건은 일단락됐다. 처음부터 삭발한 이유를 묻고 진지하게 검토했더라면 이런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학교 당국은 사건이 확대된 후였지만 잘못된 처분을 바로 시정했다. 잘못된 판단을 내린 뒤에 그 잘못을 감싸고 덮어버리기에만 급급한 우리의 현실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린프로 역시 어린 학생답지 않게 참으로 의연했다. 한 인터뷰에서 린프로는 “있는 규정을 원칙대로 적용한 학교의 조치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규정을 바꿔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미국의 저력’을 재삼 확인케 해주는 사건이었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는 나의 말이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고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논어 ‘학이(學而)’ 편에 나온다.
이 말이 새삼 도민들에게 회자(膾炙)된 것은 구성지 제주도의회 의장에 의해서였다. 구 의장은 이달 7일 열린 의정정책회의에서 향후 의사일정과 관련 ‘과즉물탄개’를 언급하며 철저한 준비로 대안을 제시하는, 달라진 의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다시 논어(論語)로 돌아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무게 있게 행동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배워도 견고하지 못하다. 진실하고 믿음을 주로 삼아 자기만 못한 자를 벗하지 말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내가 나를 성찰한다는 것은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내가 인식하여 고치려 애쓴다면 그것이 곧 ‘공부’라는 게 공자의 지론이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태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부터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이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별로 본 적도 없다. 무릇 소인배들의 경우 사람들의 눈에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 수모를 당할까 전전긍긍하기 마련이다. 허물을 들추기보다 감추기에 급급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최단명 총리로 기록되며 낙마(落馬)한 이완구 전 총리가 대표적인 사례다. 자신의 허물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솔직하게 사과했더라면 최소한 불명예 퇴진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신(過信)에 찬 경거망동과 잇따른 말바꾸기로 국민 여론이 등을 돌림으로써 스스로 화(禍)를 자초했다.
최근 들어 자식(사위)을 잘못 관리해 수렁에 빠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당 내분에 휩싸인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 또한 같은 범주에 속한다. 아들·딸 인사 청탁으로 물의를 빚은 국회의원들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제주지역 정가의 경우 이제 2015년을 마무리하는 수순에 접어들었다. 오는 10월 행정사무감사가 있는가 하면 11월엔 새해 예산안 심의, 도정 및 교육행정 질문 등이 기다리고 있다. 때문에 구성지 의장의 언급처럼 허물이 있으면 고쳐나가는 ‘과즉물탄개’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그것은 집행부나 개개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공자가 말하는 공부(工夫)는 다른 게 아니다. 스스로를 살펴 허물을 인정하고 고쳐나가는 것에서 공부는 시작된다.
‘자, 우리 모두 공부를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