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다린(mandarin)이란 명칭은 감귤류를 총칭하는 표현으로 운향과 관목이나 관목에 딸린 귤 종류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유럽 각지로 전파된 것 중에서 색이 주황색을 띤 노란색계의 경우 만다린, 미국 등지로 전해진 주홍색계를 탄제린(tangerine)으로 구분한다.
쉽게 설명하면 시장에서 비교적 쉽게 보이는 것을 만다린 오렌지라고 한다.
지중해 지역에서는 클레멘타인 만다린, 북미 카라 마다린, 일본 사가 만다린, 호주 골드오렌지로 부르기도 한다.
특징은 일반 감귤에 비해 붉은빛이 더 강하고 당도가 높다.
맛과 향이 일반 감귤에 비해 뛰어나나, 과일의 특징이 부피과(과피가 부푸는 증상) 발생이 잦아 노지가 아닌 하우스에서 재배해야 한다.
만다린은 거북이 등처럼 우둘투둘 생긴 것이 당도가 높고 12월 말에서 1월 초순까지 수확하고 1월~2월 출하한다.
제주 지역에서는 극히 일부 농가에서 재배하고 있어 백화점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과일로 알려졌다.
● 한 해 조수입 1억5000만원···수확시기 인부만 250명 고용
제주 지역에서 극히 일부 농가만 재배하는 만다린 품종을 1990년대 초반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0년 넘게 가꾸고 있는 농가가 있다.
그 주인공은 서귀포시 강정동 악근천 인근 6000평 규모의 농지에서 3400평 시설 하우스를 운영하면서 3100평 하우스에서 만다린을 재배하는 강경주(72) 아주농장 대표.
강경주 대표는 한 해 만다린 40여 t을 수확해 조수입 1억5000만원을 올리는 억대 농부다.
현대백화점 산하 현대 그린푸드와 농가 직영 계약을 맺고 수확량의 60~70%를 납품하고 있다.
만다린 수확 시기에는 20일 동안 매일 6~8명의 인부를 쓴다. 1년에 약 250명 안팎. 인건비만 1500만원이 넘고 이들에게 들어가는 식대와 간식비 등도 이와 비슷하다.
3~4주 저장 후 1~2월 판매하는 데 포장을 위한 인부도 60일 동안 매일 3명, 180명을 쓴다.
강경주 대표는 “만다린은 껍질이 잘 까지는 오렌지로 불리고 미국에서는 껍질이 잘 벗겨지면 만다린, 그 반대는 탄제린이라고 하기도 한다”며 “12월 중순 수확을 마무리하고 1~2월 판매하는 데 고정적인 판로가 있고 새해와 설 명절 시기여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좋다”고 말했다.
● 초등학교 졸업 후 농사 시작…‘우여곡절’ 많아
지난 9일 강경주 대표를 강정동 농장에서 만났다.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는 그는 집안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보리와 고구마 농사를 짓는 부모의 농사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스물여덟 살에 부인 현순희(68)씨와 결혼을 했다.
농사일에 이골이 날 때쯤 서귀포시내에서 농기구 대리점 한일기계상사를 운영했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13년 동안 대리점을 운영하며 제주도 전역에 농기구를 공급했다.
강 대표는 “14세 때부터 집안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결혼한 후에 농기구 대리점을 운영했다”며 “인근에서 최초로 경운기를 농사에 도입하기도 했고 제주도 전역에 농기구를 공급하니 영향력도 있었다”고 추억을 떠올렸다.
이어 “대리점이 잘 나갈 때는 종업원을 5명까지 썼다”며 “하지만 정책사업으로 추진되다 보니 소득은 별로 없었고 지출만 늘어났다”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농기구 대리점 회사에서 1년 치 농기구를 사왔는데 그 때 어음을 3개월짜리로 끊었다”며 “어음 기한은 돌아오는 데 판매되는 농기구가 별로 없었고 결국 어음을 돌려막다 보니 부채가 점점 커졌다”고 토로했다.
1970년도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빚만 5000만원 정도.
빚을 갚았다가 다시 빚을 지고, 또 갚고 다시 빚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이처럼 검게 그을린 그의 얼굴과 주름처럼 삶은 순탄치 않았다.
일만 하다 보니 자식 농사도 좀 늦어졌다. 큰딸이 올해 서른 살. 작은아들은 스물아홉 살이다.
강 대표는 “대리점을 하면서 초창기에는 돈을 좀 만졌지만 해가 지날수록 지출만 늘어났다”며 “그러다가 돈을 갚기 위해 1984년, 바나나 재배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강 대표는 빚이 있는 대리점을 정리도 하지 못 한 채 또다시 5000만원 정도의 빚을 지고 바나나 재배에 나섰다. 이는 서귀포시 서부 지역에서 최초였다.
첫해 1800평의 땅을 임대해서 그 위에 대출을 받아 하우스 시설을 조성했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바나나를 재배한 그는 한 해 1억원 이상을 벌었다.
1억원 정도면 당시로 치면 집 3채 정도는 거뜬히 장만할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런데 강 대표는 한 해 벌어서 땅을 샀고, 빚을 갚았다. 또 땅을 사고 빚을 갚았다.
바나나 재배를 하면서 5필지, 약 3000평의 하우스를 샀고 집도 지었다.
이러한 봄날도 잠시. 바나나가 수입되면서 대체 작물로 유자나무를 심었다.
하지만 유자나무에 대한 전망도 어두웠다.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제주시 지역에서 동네 선배가 재배하는 만다린 농장.
주황빛의 열매와 부드러운 육질에 반했다.
선배를 졸라 만다린 순을 따다가 유자나무에 접을 붙였다. 순차적으로 확대하던 것이 지금에 이르게 됐다.
● 만다린 재배 20여년···믿음 하나로 버텨
강 대표는 하우스 1300평에서 만다린을 재배했고, 소득은 1995년부터 나왔다.
강 대표는 “만다린 품종은 원래 제주대에서 시험용을 재배하던 것이지 민간 보급용이 아니었다”며 “테스트 과정에서 제가 재배를 한 것이어서 고생을 엄청나게 했다”고 말했다.
농사 방법은 감귤과 비슷했지만 수확한 후 저장 방법을 몰랐고, 판로도 없었다.
맛이 좋고 해거리도 덜했지만 늦게 수확하면 부풀어 버리는 단점이 있었다. 생소한 과일이기에 소비자에게 외면도 받았다.
실제로 강 대표는 환갑이 넘어서야 고정적인 판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바나나 대체 작목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소비자와 만날 방법이 없었다.
바나나 재배로 벌었던 것을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까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하우스 1400평 정도를 팔았다. 그래도 안 돼 손 수 지은 집도 팔았다. 이 때 부채만 5억원이 넘었다. IMF까지 겪으면서 한 해가 지나면 원금이 4000만원~5000만원 늘어났다.
강 대표는 “수확량은 늘어나는 데 소비량은 오히려 줄어들어 수확량 절반 이상을 버리기도 했다”며 “급기야 아내가 다른 작물로 전환하지 않으면 같이 살 수 없다는 말까지 했다”고 헛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강 대표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결국 제주공항에 있는 감귤농협직판장에서 많은 규모는 아니지만 꾸준히 판매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신세계와 롯데, 글로리아, 현대 등 대형 백화점에도 납품을 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납품을 하지 못했다.
강 대표는 “지구력 하나로 버텼다. 된다는 믿음 하나로 버티고 버텼다”며 “주위에서 한라봉으로 전환하라고 계속 설득도 했지만 새로운 품목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결국 현대 그린푸드에 고정적으로 납품, 고정적인 수입까지 생겼다”고 설명했다.
현재 강 대표는 아주농장과 함께 서귀포시 강정동 악근천 인근 여울목 펜션(739-3322)도 운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강 대표는 “제가 돌아다닐 수 있는 한 계속 만다린을 재배할 것”이라며 “그 이유는 소비자들이 만다린을 좋아하니까”라고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