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산담’ 제주만의 풍광 연출

제주도의 전통적인 가족공동체문화 가운데 추석명절을 앞두고 해마다 이뤄지는 벌초가 있다. 소분이라고도 했는데 추석을 앞두고 ‘큰 일’이었다. ‘예초기’라는 기계가 없던 시절 손으로 모든 것을 처리해야 했다. 옛날 무기처럼 날이 긴 ‘장호미(긴 낫)’를 사용하는 ‘전문가’가 있었으면 모르되 낫으로만 벌초를 할 때는 그야말로 고생이었다. 땡볕 아래 쪼그리고 앉으면 왜 그리 볕은 따갑고 산담 안은 바람 한 점 없이 ‘포옥’ 하던지. 절기상으로도 더운 때여서 비오듯 흐르는 땀을 참으며 낫질을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즘은 예초기가 있어서 쉬워졌다. “조상님들이 기계소리에 놀란다”며 사용에 반대하던 목소리들도 시대의 조류에 묻힌 느낌이다. 이젠 예초기 없는 벌초는 생각할 수도 없게 돼 버렸다.
엊그제 어머니를 모시고 아들과 함께 벌초를 다녀왔다. 빨리 끝내야겠다는 조바심으로 기계를 들고 혼자 이리저리 헤쳐 나가고 있다. 아들은 낫질도 서툴다. 피곤함은 뒤로하고 앞으로 이들이 벌초를 할까하는 의문이 든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세태가 바뀌면서 벌초문화는 변화되는 모습이다. 핵가족화로 변화가 불가피해진 가운데 가족공동묘지가 조성, 한곳에 묘들이 모이는 경향도 변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화장이라는 장묘문화의 성행도 한 원인이다. 예전에는 남자가 없어 대(代)가 이어지지 못한 집안은 양자를 들여 벌초를 대신했지만, 이제는 그렇지도 못한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제주의 장묘문화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것은 ‘산담’이다. 조선시대 유교문화가 제주에 들어온 뒤 소나 말의 피해로부터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산담이 시작된 듯하다. 제주 관련 문헌에 ‘밭머리에 무덤을 쓴다’는 풍속 기록을 보면 자기 땅이 아닌 경우 이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필자의 증조모, 조부의 무덤도 경작하고 있는 밭에 위치하고 있다. 중산간 오름자락에도 돌담에 둘러싸인 수많은 봉토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자연과 어우러져 제주만의 풍광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도내에 문화재로 지정된 무덤은 고려시대 이후 화북 거로능동산 방묘 등 7기 정도가 확인된다. 제주 입도조나 제주의 예전 왕자 혹은 유명인의 무덤들이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무덤형태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철기시대(탐라시대)의 옹관묘와 석곽묘가 알려져 있다.
그리고 고려말 이후 방묘라는 묘제가 성행하는데 토광을 하고 목관을 안치한 후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직사각형 모양으로 돌을 무덤위에 쌓아 석곽형태로 만든 후 봉분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벌초하는 무덤은 토광에 목관을 안치한 후 봉분을 쌓은 것이다. 이러한 방묘는 육지부의 것과는 다른 것으로 제주 서남부지역에 최근까지도 이용하는 사례를 확인 한 바 있다.
최근 석곽묘 형태의 방묘가 강정동에서 10기 이상의 집단으로 발견된 바 있다. 진작부터 돌보는 이가 없는 듯 이른바 골총이었다.
제주도에서 방묘의 집단묘가 확인된 사례는 흔치 않다. 이러한 무덤을 조사하면 수저·청동그릇·도자기·구슬 등 부장품이 발굴되기도 한다. 유물과 무덤형식으로 무덤의 축조된 시기를 추정할 수가 있다. 강정동의 무덤은 근래에 도굴된 것으로 나타났다. 더 이상 훼손되기 전에 보존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개발로 인한 돌담·봉분의 파괴, 가족공동묘지 등으로 이장되는 무덤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제주 곳곳에서 벌어지는 벌초하는 모습과 산담의 ‘풍광’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전통문화가 변화되는 모습과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살고 있다. 언젠가는 장묘문화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문화는 변화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후손들은 원래의 모습을 영영 잊어버리면서 살게 될 것이다. 아들에게 “벌초를 계속할거냐”고 물어봤다. 대답이 시원치 않다. 또 걱정이다. 우리 조상들이 그러했듯 우리 아들들은 벌초를 할까하는 조바심도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