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직사회 ‘용역 남발’ 고착화
올해 학술연구 용역비만 76억
공무원들 책임회피 수단 변질
최근 4억원 들인 ‘道 조직진단’
副知事 증원·감사위 독립 후퇴
“이런 용역 왜 했나” 여론 뭇매
지난해 12월 초, 제주도의회 행정자치위원회는 특별자치행정국 소관 2015년도 예산안 심사를 진행했다. 이날 도마에 올라 의원들의 집중 질타를 받은 것은 바로 ‘용역(用役) 남발’ 문제였다.
포문은 김경학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먼저 열었다. 김 의원은 “우근민 도정 초기인 2011년 용역 예산은 34억원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민선6기 원희룡 도정의 새해 용역 예산은 76억원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이어 “내년도 용역 예산은 올해 대비 205% 증가한 58억 규모지만 명시이월 제주미래비전 용역 18억원을 포함하면 증가폭은 300%가 넘는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무분별한 용역 남발로 ‘용역 도정(道政)’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고정식 위원장(새누리당)도 비판에 가세했다. 고 위원장은 “전체적으로 용역이 남발되고 있다”며 “민군복합관광미항 건설 백서(白書)발간 기초자료조사 연구용역은 추진단에서 신청하고, 사업 배정은 자치행정과로 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추궁했다.
각종 시책 개발과 원활한 사업 추진을 위해 학술연구 등의 용역이 필요하다는 것엔 이견(異見)이 없다. 정작 문제는 공무원들이 사업 타당성 검토를 내세워 책임 회피 수단으로 활용키 위해 툭하면 용역을 남발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용역들을 보면 내용이 유사하거나 이미 시행된 용역과 중복되는 사례가 허다하다. 심지어 ‘이런 것’까지도 용역을 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드는 사안마저 수두룩한 실정이다. 제반 용역에 들어가는 예산은 모두 도민들의 ‘피같은 돈(血稅)’이다. 과연 자기 주머니 돈이라면 이렇게 용역을 남발하고 예산을 마구 썼을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최근의 사례 하나만을 살펴봐도 용역의 문제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은 지난달 27일 ‘제주특별자치도 조직진단 연구용역’ 최종보고서를 발표했다. 6개월간 수행된 이 용역엔 4억원이란 거액의 예산이 투입됐다.
이번 연구용역의 핵심 내용은 부지사 1명 증원, 그리고 감사위원회의 복무감찰 기능을 분리해 도 본청으로 이관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우선 부지사(副知事) 증원의 경우 행정부지사 외에 경제부지사를 신설해 산업 전문역량을 관리하고, 정무부지사는 소통과 창조협력을 전담하는 것으로 제시됐다. 3부지사 체제는 용역진이 경기도를 참고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권고안(勸告案)’이라 하지만 인구가 1000만이 넘고 1년 예산만 21조원에 달하는 경기도와 비교해 인구 63만에 예산 4조원인 제주도를 끼워 맞추는 게 과연 타당성 있고 설득력 있는 결론인지 의아스럽다.
용역진은 도감사위의 위상(位相)과 관련해서도 제주의 실정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내놨다. 현재 지역의 여론은 ‘감사위의 완전한 독립’이다. 지금처럼 제주도가 인사권과 예산까지 전부 쥐고 있는 상태에서 감사위의 독립적 활동은 요원하다. 때문에 독립성 강화를 위해 감사위원장 직선제 도입이나 사무국장 및 부서장 개방형직위 지정 등이 요구돼 왔다.
그런데도 용역결과는 감사위의 복무감찰 기능을 분리해 행정부지사 직속(공직윤리감찰관 신설)으로 이관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독립성 강화는커녕 오히려 거꾸로 후퇴한 꼴이다. 거액(巨額)을 들여가며 왜 이런 용역을 실시했는지 의문이란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앞서 의회서 거론된 용역예산 76억원은 학술연구 등에 국한된 것이다. 시설이나 정보통신, 운송 등 기타 분야를 합친 도 본청의 용역계약은 2014년에만 무려 754건 412억원에 달한다. 가히 ‘용역 공화국’이라 불릴만 하다.
꼭 필요한 ‘용역’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자체 인력으로 충분히 가능한 사안까지 혈세를 펑펑 써가며 책임 회피식 용역을 남발하는 게 문제다. 언제까지 이런 악순환(惡循環)을 되풀이할 것인가. ‘공복(公僕·공공사회의 심부름꾼)’의 의미를 제주의 공무원들이 재삼 되새겨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