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 큰 반향
공감은 하지만 큰 변화는 없어
석유 고갈 이후의 ‘비상시대’
대안 키워드는 ‘지역’과 ‘농업’
인간과 노동의 본성 회복 의미
제주 마을 공동체성 유지 중요
‘불편한 진실’이란 말이 있다. 진실이되 알면 불편한 걸 일컫는다. 이런 진실은 모르는 게 약일 수 있겠다. 잘 알려진 게 전 미국 부통령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이다. 개발에 따라 닥칠 어두운 미래상을 그렸다. 반향은 컸고 독자들은 불편했다. 크게 공감했지만 난폭하게 진행되는 개발을 어찌할 요량 없으니 그런 거다.
인류의 어둔 미래를 내다보는 ‘불편한 진실’의 전도사들은 허다하다. 관련 책자도 넘쳐난다. 허나 세상은 크게 달라지는 게 없다. 개발이 미덕인 자본의 속성 탓이다. 게다가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이 안 따라준다.
뉴욕 출신 저널리스트였던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는 10년 전 쯤 ‘장기 비상시대(The Long Emergency)’라는 책을 발표했다. 쿤슬러의 비상시대 선포 근거는 석유다. 석유가 오늘날 인류 문명에서 갖는 의미가 각별하기 때문이다.
석유는 현대인 1명에게 100명의 노예를 부리는 것과 맞먹는 능력을 제공했다. 세계 곡물 생산량을 250% 늘린 것도 석유가 있어 가능했다. 20억~30억명 수준의 지구 부양능력이 2~3배 쯤 늘어난 것도 석유 덕이다. 석유는 현대 문명의 ‘처음과 끝’이라 봐도 좋겠다. 지구가 1일 여행권으로 좁아지고, 자본시장이 세계화된 것은 석유 신화의 절정이다.
이런 마법의 액체가 생산 정점을 지나 고갈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건 이미 상식이다. 덩달아 세계화 경제 시스템에도 균열 조짐을 보인다. 그런데도 인류는 몽유병 환자처럼 벼랑 끝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쿤슬러는 일갈한다. 그 벼랑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거나, 알려 하지 않는다고 탄식한다.
쿤슬러의 이야기는 이 대목에 집중된다. 벼랑 끝에서 만나게 될 전 방위적 혼란 상황을 살핀다. 산업 성장의 중단, 생활수준의 급격한 저하, 편의와 안락의 상실, 수명 단축, 식량 생산과 인구 감소, 군사 분쟁, 정치적 혼란 등은 필연적일 것이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혼란은 개개인에게 배고픔과 추위, 폭력 등으로 구체적으로 닥칠 것이다. 현대 문명의 총체적 붕괴에 따른 전면적 위기는 이렇듯 안락한 ‘생활’ 대신 ‘생존’ 자체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세상이라는 이야기다. 불편해도 너무 불편하다.
그렇다면 대비책이 있기나 할까. 쿤슬러의 대안은 두 가지 키워드로 제시된다. ‘지역’과 ‘농업’이다. 석유 없는 세상에서 그나마 가능한 거의 전부다. 더 멀리, 더 빠른 이동을 위해 구축된 기존 시스템은 폐기돼야 한다. 대신 지역 중심의 삶을 꾸려야 한다.
이후 세상에서의 삶은 ‘연료’인 석유가 없으니 지역적으로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먹을거리는 지역에서 생산하거나 구해야 할 것이며, 가정과 일터의 거리도 걸을 정도로 가까워야 한다. 삶의 양식의 전면적 전복인데, 따지고 보며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쿤슬러의 이야기가 불편하긴 해도 그나마 희망을 걸어볼 여지가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지역 단위의 농업을 통해 사회적 협력 네트워크가 구축되고, 나의 노동으로 가족과 이웃이 더불어 사는 건 곧 인간과 노동의 본성 회복일 수 있으니 그렇다.
제주처럼 곳곳의 마을이 어느 정도 공동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회라면 그다지 절망적이지 않을 거다. 오랜 세월 수난과 시련을 함께 견디고 버텨오면서 형성된 제주 마을의 공동체성은 그 자체가 제주의 가장 소중한 사회적 자산이며, 위기국면을 극복하는 원동력이니 말이다.
문제는 수 년 째 부는 개발 광풍과 투기자본의 대규모 유입, 치솟는 땅값 등이 마을 공동체마저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토건자본이 부수는 건 자연환경만이 아닌 셈이다.
이렇게 볼 때 난폭한 개발을 막아내는 것은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저 자연환경을 지키는 것 이상이다. 고귀한 마을공동체성을 지키는 것으로 확장되며, 동시에 ‘장기 비상시대’를 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쿤슬러의 장기 비상시대는 내일이 아닌 오늘의 이야기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