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딱서니 없는’ 부부연극인
지금은 부러움의 대상 되기도
하지만 쉽지만은 않은 삶
소극장 문 열고 닫고 5번
제주 연극시장 녹록지 않아
그래도 ‘35년 기념공연’ 등 계속
우리는 부부연극인이다. 연극을 시작한 지 올해가 35년째다. 어른들 말을 빌리자면 현실도 모르고 좋아하는 일이라고 무작정 덤벼드는 부나비 같고 철딱서니 없는 부부연극인이다. 물론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을 하니 얼마나 행복하냐”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한 길을 35년이나 꾸준하게 걸어온 듬직하고 자랑스러운 연극의 산증인이라고 추켜 세워주기도 한다.
하지만 말만큼이나 쉽지만은 않는 삶이었다. 아이도 셋이나 낳고, 번듯한 집에서 살아보지 못하고 싼 방을 찾아 이리저리 이사를 다닌 게 일곱 번이다. 그러다 그나마 안정된 환경은 학원을 시작하면서부터다. 학원 안에 방을 꾸미고 살면서 낮에는 학원, 밤에는 연극연습실, 하루가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전투하듯이 살아왔다.
우리의 35년 연극인생은 제주에서의 소극장운동을 빼고 얘기할 수는 없다. 소극장에서 매일 공연을 꿈꾸며 문을 열고 닫고를 5번이나 했다. 처음에는 중앙로 커피숍 4층 꼭대기 층에 20명이 들어오면 만석인 작은 무대에서 시작했지만, 우리의 본격적인 소극장 운동은 제주동초등학교 앞 골목 슈퍼집 지하 ‘자유무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매일 공연을 하다보면 관객들은 몰려올 거라는 기대와 바람 속에 1달 장기공연을 하기도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업연극인으로 살아보기도 했다. 작은 봉고차에 무대랑 소품·의상을 잔뜩 싣고 육지 순회공연도 다녀올 정도로 무모해도 과감하고 열정적인 활동을 한 시기다.
그렇게 4~5년을 버티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그러다 과외를 접고 학원을 운영하면서 그나마 안정적인 살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용담동 자장면집 지하에 소극장을 열었다. 그러나 우린 그곳에서 기억에 남는 공연도 못하고 연습만 하고 다른 극단에게 대관해주다가 문을 닫고, 연동 코스모스 사거리로 옮기게 됐다. 연동 세이레아트센터에서 7년 동안 꿈틀거리다 나리태풍 때 물난리를 겪고 지금의 터미널에 둥지를 틀었다.
이왕 하는 거 투자도 하자며 겁 없이 중기자금도 빌리고 적금·보험도 깨서 투입한 보금자리가 지금의 세이레아트센터다. 그리고 이곳에서 ‘우리의 꿈’ 35년 기념으로 ‘늙은 부부이야기’를 1달간 공연한다. 함께 연출하고 연기하는 둘만의 공연이다. 그동안의 관객과 후원회원분들께 고마운 인사로, 그리고 앞으로 더 열심히 활동하겠다는 약속을 드리면서 준비한 공연이다.
얼마 전 가슴 아픈 소식을 접했다. ‘김운하 연극인, 고시원에서 숨진 채로 발견’이라는 소식이었다. 몇 해 전 ‘최고은법’이라는 연극인들의 복지관련 법이 제정되었지만 연극인들의 처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예술인 실태조사에서 한 달 수입이 100만원 아래인 연극인이 74%에 달했다고 하니 사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이 갈 것이다.
오죽해야 연극은 가난해야 한다고 역설적으로 표현할까. 우리도 ‘영세’하다. 연극 연습을 2달 넘게 하고 공연도 20회 이상 하는데 출연료가 고작해야 평균 100만원 정도다. 아니 경력이 따라 출연료가 달라지니 평균으로 보면 80만원 이하다.
1년에 많아야 서너 작품이다. 그렇다고 관객이 많아 공연수익이나 많나. 이게 현실이다. 연극 시장이 성장하지 않는 한 생활고는 연극인의 숙명처럼 붙어 다닐 수밖에 없다. 제주의 연극시장 상황은 녹록지 않고, 연극 시장은 오히려 대형 공공극장 위주다. 살림이 어려운 지방소규모 극단이 설 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사실, 시원한 커피숍에 앉아 영화 보고 음악 듣는 시대에 발품 팔아 티켓 사고 관람하는 일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스마트시대에 연극은 아날로그니 그럴지도 모르나, 디지털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날로그는 살아남는다.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연극은 분명히 살아남는다.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는 일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연극인생 25년, 30년을 더 꿈꾼다. 꿈은 꾸는 사람만이 이룰 수 있다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