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의 정치’ vs ‘어메이징 그레이스’
‘배신의 정치’ vs ‘어메이징 그레이스’
  • 김계춘
  • 승인 2015.0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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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어메이징 그레이스’
슬픔의 장례식장 감동 물결로
위기 때 빛나는 지도자의 品格

‘배신의 정치’ 朴 대통령
‘내탓’보다 모든 게 ‘네탓’
국민들은 웃는 지도자 원해

지난 26일 오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농구경기장. 총기난사 희생자 장례식에 참석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30분 남짓 추모연설을 하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의 입에서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놀라운 은총)가 흘러나왔다.

“우리가 선량함이라는 은총을 발견한다면 모든 게 가능해집니다. 그 은총을 통해 모든 게 바뀔 수 있습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어메이징 그레이스…”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왔고 단상의 목사들이 차례로 일어섰다. 오르간이 반주를 시작하자 성가대와 6000명에 달하는 추모객이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소리 높여 합창했다. 이 광경은 미국 전역에 생방송됐으며, 위싱턴 포스트와 CNN 등 미 언론들은 “오바마 대통령 재임 중 최고(最高)의 순간”이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영국 성공회 존 뉴턴 신부가 만든 찬송가다. 흑인 노예무역에 관여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이 죄를 사해준 신의 은총(恩寵)에 감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은 찰스턴 흑인교회 총기 난사사건 때 희생당한 핑크니 목사를 비롯해 9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은총’을 소리쳤다. 인종 갈등과 반목을 넘어선 화합(和合)도 강조했다. 슬픔이 가득했던 장례식장엔 위안과 평화의 물결이 출렁였다. 진정 ‘미국의 힘’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한때 바닥까지 갔던 오바마 대통령이 부활(復活)한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지속의 리더십, 설득의 리더십, 감성의 리더십을 꼽는다. 이라크·아프간 종전(終戰)을 선언하고 미군 철수를 추진하면서 나약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일관성을 유지했다.

최대 현안이었던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타결을 위해선 ‘적(敵)과의 동침(同寢)’도 서슴지 않았다. 의회를 찾아 여야 지도부를 설득했고 상대방에게는 ‘당근’도 제시했다. 이번 찰스턴 장례식장은 오바마의 ‘감성의 리더십’을 보여준 결정판이었다.

지도자의 기지와 유머는 위기(危機)의 순간일 때 더욱 빛을 발한다. 1981년 3월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존 힝클리의 저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을 때의 일이다.

간호사들이 지혈을 위해 레이건의 몸을 만졌다. 레이건은 아픈 와중에도 이런 유머를 던졌다. “우리 낸시에게 허락은 받았나?” 얼마 후 나타난 낸시 여사에겐 이렇게 말했다. “여보, 미안하오. 총알이 날아왔을 때 영화에서처럼 납작 엎드리는 걸 깜빡 잊었어….” 생(生)과 사(死)의 기로에서도 능청스러운 유머로 국민을 안심시킨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떤가. 박근혜 대통령은 이달 25일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격정(激情)을 쏟아냈다.

이날 박 대통령은 개인적인 보신주의와 당리당략, 끊임없는 당파싸움 등을 거론하며 여야를 싸잡아 비난했다. 이제는 개인이 살아남기 위한 정치를 거두고 국민을 위해 살고 노력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국정에 협조해달라는 요구인 것 같은데, 우리의 머릿 속엔 대통령의 노기(怒氣)어린 모습과 ‘배신의 정치’라는 말 밖엔 생각이 나질 않는다.

임기 중반을 넘어선 박근혜 대통령으로선 초조하기도 할 것이다. 취임 초 국정원 대선 개입 논란에 발목이 잡히더니 지난해엔 세월호 참사(慘事), 그리고 올해는 메르스까지 덮쳤다. 이를 감안하면 국무회의에서의 격정 토로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모든 책임을 ‘네 탓’으로 돌리는 현실에 대한 인식은 너무 이기적이다. 다소 억울함이 있더라도 ‘내 탓’임을 인정하고 정치권의 협조를 구했어야 했다. 특히 책임의 대부분을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야당에게 전가하며 또 다른 정쟁(政爭)을 유발한 것은, 대통령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국민들을 향한 ‘배신(背信)의 정치’에 다름 아니다.

위기의 순간에 국민들은 지도자의 리더십을 원한다. 비록 번뜩이는 기지나 유머는 아닐지라도 우리는 밝게 웃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다.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앙받는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북전쟁의 와중에서 이런 말을 한 것으
로 알려졌다. “나는 울면 안 되기 때문에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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