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영화는 간데없고 근·현대사 아픔의 흔적만
옛 영화는 간데없고 근·현대사 아픔의 흔적만
  • 박수진 기자
  • 승인 2015.0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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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이야기따라
⑭관덕정과 제주목 관아 지나는 ‘관덕로·무근성길’
▲ 이재수의 난과 1947년 ‘양과자 반대시위’ ‘삼일절 발포사건’ 등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관덕로에는 관덕정과 제주목관아지가 있다.

10대 시절 자주 갔던 제주시 중앙로. 중앙로는 친구들과 쇼핑을 하러가거나 카페 또는 식당에 가기 위해 자주 갔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10번이나 500번을 탄 뒤 제주시청~시민회관 등을 지나면 중앙로에 도착한다. 중앙로 즈음이 되면 버스에서는 “다음 정류장은 관덕정 입니다”라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그래서인지 10번이나 500번, 36번 등을 탄 뒤, 중앙로를 지나면 관덕정이 나온다는 것을 아주 어렸을 적 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관덕정’이 어떤 곳이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누군가 나에게 “관덕정이 예전에 제주도에서 어떤 기능을 했던 곳인지 아니·”라고 물었을 때 선뜻 대답하지 못했던 기억도 있다. 이번에 소개할 곳은 관덕정과 제주목 관아가 위치해 있는 ‘관덕로’와 이 인근에 있는 ‘무근성길’이다. 삼도2동에서 일도1동까지 이어지는 관덕로는 거리상 0.687km에 해당한다. 무근성길(삼도2동)은 약 0.459km다.

 

▲역사·깊은·관덕정과·제주목·관아

중앙로에서 서문시장이 있는 서쪽으로 이어지는 관덕로는 1963년 보물 제322호로 지정된 ‘관덕정’ 앞을 지나는 길이라는 뜻이다. 관덕정은 조선 4대 왕인 세종 30년(1448년)에 제주 목사 신숙청 시절 군사 훈련을 위해 지었다. 관덕(觀德)은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라는 유교 경전에서 유래했다. 관덕정은 군사 훈련 뿐만 아니라 과거를 치르는 시험장으로, 군사 검열을 하는 곳으로, 진상할 군마를 점검하던 곳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20세기에 이르러 관덕정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재수의 난(1901)을 비롯해 1947년 제주의 중학생들이 미군정에 반대, 양과자를 먹지 말자는 ‘양과자 반대시위’를 벌였고, 그해 3월 1일에는 3·1절 기념식 도중에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숨지고 6명이 부상당하는 ‘삼일절 발포사건’이 있었다. 또한 제주를 방문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대회가 열렸고, 1959년 도내에서 최초로 국보로 지정됐다.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24년에는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인들은 관덕정을 보수하면서 주변 도로에 처마가 걸린다는 이유로 15척(454.5㎝)이나 되던 긴 처마의 끝부분을 2척(60.6㎝)이나 잘라냈다. 이에 제주시는 지난 2006년 관덕정 내부에 그려졌던 대수렵도, 십장생도 등 8점의 벽화와 단청, 처마 등을 복원한 바 있다. 현재 관덕정 광장에서는 탐라국 입춘굿과 거리예술제 등이 열리고 있다.

관덕정 주변에 있는 제주목 관아는 조선시대 제주목에 파견된 지방관인 목사가 업무를 보던 관청 건물이다. 일제 강점기때 집중적으로 훼손된 제주목 관아는 1991년~98년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르는 여러 건물터와 유구가 확인되면서, 대한민국 사적 제380호로 지정됐다. 2012년에는 제주목 관아의 객사(客舍)인 영주관 터가 사적으로 추가되면서 문화재구역이 확대되기도 했다. 제주목 관아에서는 설맞이 전통민속 놀이마당과 수문장 교대의식 등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 제주목 관아지에서 서쪽으로 가다보면 ‘무근성길’이 나온다. 무근성의 옛이름은 ‘묵은성’이었는데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내려오며 지금의 무근성으로 변형됐다. 구제주의 가장 번성한 주택가였던 이 곳은 할머니 버선 모양을 하고 있다.

▲‘묵은성’에서·‘무근성’으로

제주목 관아지에서 서쪽으로 가다보면 ‘무근성길’이 나온다. 무근성에는 제주의 옛 왕국인 탐라시대때부터 ‘성’이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새로운 제주읍성이 쌓이자, 기존에 있던 성을 ‘묵은성’이라 불렀다. 이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무근성’으로 변형됐다. 구제주의 가장 번성한 주택가 였던 것으로 알려진 무근성은 할머니 버선과 닮았다고 한다.

이 일대는 제주지역에서 처음으로 범죄예방을 위한 환경개선사업이 추진되기도 했다. 이 사업은 관덕정~북초등학교~서울호텔 뒤편 일대까지1.56km에 걸쳐 이뤄진다. 실제로 무근성 일대주민 200여명을 대상으로 이 사업에 대한 만족도 조사를 한 결과 평균 만족도는 71.5%로 나타나기도 했다.

제주 곳곳의 이야기를 꾸준히 그림책으로 만들고 있는 제주그림책연구회는 2006년 무근성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우리 동네 무근성’을 발간한 바 있다. 그로부터 9년 후 그림책갤러리 제라진은 제주그림책연구회를 초청한 가운데 ‘추억이 새록새록 살아 숨쉬는 마을 이야기-우리 동네 무근성’이라는 전시를 열고 있다. 전시에서는 무근성에 살았던 주민들의 사진과 1970~80년대 무근성 골목과 주택의 모습, 결혼식과 장례식 풍경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삼도동의 유래

옛 탐라시대 도읍지…1983년 삼도1·2동으로 분리

원래 제주의 옛 왕국인 탐라시대의 도읍지였던 제주시 삼도동(삼도1·2동)은 938년 고려에 소속됐다.

그 후 1211년 탐라에서 제주로 개칭됐고, 1416년 한라산을 경계로 북쪽을 ‘제주’라고 명명하면서, 목사(牧使)를 두어 통치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제주면 삼도리가 됐다가, 1955년 제주시 삼도동으로 개편됐다. 1983년 삼도동은 삼도1·2동으로 나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는 관덕정과 제주목 관아 외에도 향사당(제주유형문화재 제6호)과 녹나무(제주도기념물 34호)가 있다. 지난해 기준 삼도동에는 1만2000여명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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