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疫病)의 역사와 ‘메르스’
역병(疫病)의 역사와 ‘메르스’
  • 김계춘
  • 승인 2015.0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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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 막론 전염병 창궐
천연두·흑사병 등 ‘사상 최악’
아즈텍 문명도 역병으로 멸망

메르스로 온 나라가 ‘뒤숭숭’
정부 무능·불안감이 禍 키워
공동체 연대로 逆境 극복해야

우리 조상들은 전염병이나 돌림병을 역병(疫病)이라 불렀다. 흔히 욕으로 쓰이는 ‘염병할~’의 염병(染病)도 같은 뜻이다.

조선시대에도 역병은 창궐했다. 하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혜민서나 활인서 같은 담당 기관이 있었으나 이들이 취한 방법은 주로 피난과 격리에 그쳤다. 그 당시의 가장 중요한 대책은 역병을 일으킨다고 여긴 귀신을 달래거나 몰아내는 것이었다.

순조 21년(1821) 평안 감사가 호열자의 내습을 조정에 알렸다. “평양부 성 안팎에서 지난 그믐 무렵에 갑자기 괴질(怪疾)이 돌아 사람들이 설사와 구토를 하고 근육이 비틀리다가 순식간에 죽어버렸습니다. 열흘 만에 1000여명이 죽었으나 치료할 약과 방책이 없습니다.”

괴질은 전국을 휩쓸며 숱한 목숨을 앗아갔다. 괴질이라 불렸던 이 질병은 훗날 콜레라로 밝혀졌다. 콜레라를 호열자(虎列刺)라고 부른 것은 ‘호랑이가 살점을 찢어내는’ 큰 고통을 줬기 때문이었다.

최근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고 혼란스럽다. 발병 초기 미숙한 대응 등 정부의 무능(無能)과 무기력(無氣力)에 국민들의 과도한 불안감과 공포가 겹쳐서 화(禍)를 더욱 키웠다. 마치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격이다.

메르스 여파는 경제 전반에도 치명타를 가하고 있다. 이는 엔저 등의 대내외적인 여건과 맞물리며 나라 전체가 휘청일 정도다.

미국 CNBC 방송은 지난해 10월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이었던 전염병 9선(選)’을 발표한 바 있다. 1940~1950년대 미국과 유럽, 오세아니아에서 유행했던 소아마비를 비롯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 △말라리아 △콜레라 △결핵 △스페인 독감 △흑사병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천연두가 그 면면이다.

근대 역사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전염병은 천연두(天然痘)였다. 두창 또는 마마로 불리는 천연두는 고대 이집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전염병으로 20세기 들어 약 3억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천연두가 ‘전염병의 제왕(帝王)’이라 불리는 이유다.

천연두는 아즈텍 문명의 종말을 가져온 전염병으로도 유명하다. 600명 남짓의 에스파냐(스페인) 군사가 30배가 넘는 아즈텍 군대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용병술이 아니라 다름 아닌 천연두였다. 면역력이 없던 아즈텍인들은 에스파냐 군대에 의해 퍼진 천연두에 속절없이 당했다. 전염병이 한 문명과 종족을 멸망시키고 몰살시킨 주범이었던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541~543년 동안 동로마제국을 중심으로 유럽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작은 쥐가 옮긴 이 질병으로 인해 당시 세계 인구의 절반인 1억명 이상이 사망했다.

페스트균에서 창궐한 흑사병(Black Death)은 유럽 역사상 ‘최악의 재앙(災殃)’으로 기록된다. 1347년 시작되어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사망케 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8년에 발병한 스페인 독감은 2년간 5000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1차 대전 사망자가 1600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이 독감이 얼마나 큰 재앙이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1981년 미국에서 첫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세계에 알려진 AIDS. 지금까지 약 7500만명이 감염됐다. 이로 인한 사망자는 2005년 230만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감소추세로 돌아섰다. 콜레라와 말라리아 등도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으나 치사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이들 전염병에 비하면 메르스는 조족지혈(鳥足之血),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피해 의식은 상상 이상이다. 어쩌면 메르스라는 질병보다 각종 ‘괴담(怪談)’에 모두가 잔뜩 움추려든 꼴이다. 물론 그 밑바탕엔 도무지 미덥지 못한 정부가 있지만 국민들이라도 바짝 정신을 차려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한국의 메르스 사태와 맞물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가 새삼 회자(膾炙)되고 있다. 소설의 전개 내용이 우리의 메르스 대처 과정과 판박이처럼 흡사한 탓이다. 그러나 카뮈의 페스트는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소설 속에서 ‘페스트’란 역병을 극복한 힘은 바로 고통을 겪으면서 돈독해진 공동체(共同體)의 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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