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 유형한 것뿐만 아니라 무형의 것까지도 무참하게 짓밟는다. 그런데 제주의 현대미술은 오히려 1950년의 한국전쟁(6·25 사변)으로 말미암아 싹이 텄음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전쟁으로 온 국토가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지만 그 와중에서 전쟁을 피해 제주도로 피난온 상당수의 문화예술인들이 문화예술의 불모지 제주에 그 씨앗을 뿌렸던 것이다. 문학·미술·음악 등 각 분야의 문화예술인들은 중앙의 무대를 제주 섬으로 옮겨 활동을 함으로써 제주의 문화예술을 발아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불모지에 미술 씨앗 뿌려
미술인의 경우 이중섭, 홍종명, 최영림, 장리석, 이대원, 최덕휴, 김창렬, 구대일, 옥파일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피난민으로서 끼니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작업을 계속하면서 제주의 미술에 직·간접적 영향을 줌은 물론, 자신들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성숙시켜 전쟁이 끝난 후 한국 화단을 이끌어 가는 주춧돌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장리석(張利錫) 화백. 그는 지난 3일 자신의 작품 110점을 제주도에 기증해 훈훈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6·25 때 제주에 피난 와 살았던 인연 때문이다.
1916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939년 일본 다마가와(多摩川)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전 선전(鮮展, 조선미술전람회)에 3회 입선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개월 째되는 1950년 12월 제주로 피난을 왔다. 그는 해군 정훈부 선무공작대 요원으로 반공 포스터를 그리기도 했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나중에는 육군 제1훈련소가 있는 모슬포에서 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1954년까지 5년간을 제주에서 보낸 그는 이 해 3월 서울로 돌아가 활발한 작품활동을 한다. 1958년에는 제7회 국전(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고, 이후 서라벌 예대와 그 후신인 중앙대 예술대 회화과 교수로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이중섭, 박수근 등과 함께 우리 나라 서양화의 명인으로 추앙 받고 있지만, 이들과는 달리 혜성처럼 반짝 불꽃을 튀기다 사라지는 천재형의 작가이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거쳐 쌓아 올린 만성형 작가로 평가된다.
그는 제주생활을 통해 마음속에 각인 된 해녀, 말, 해변의 풍경 등 섬의 이미지를 즐겨 화폭에 담았다. 그가 많이 그렸던 노인과 함께 제주도의 인상은 해녀 연작이나 바닷가 풍광으로 형상화되었다. 그의 그림들에서는 제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박한 서정과 강인하고 아름다운 생명력을 보여준다.
해녀 등 제주풍광 형상화
예컨대, 해녀의 생태가 잘 드러나는 해녀 시리즈를 볼라치면 텁텁하게 발라진 마티에르와 정적인 포즈, 구도의 의식성을 배제한 상황적인 묘사가 그대로 살아나 있는 등 작가의 채취가 짙게 느껴진다. 이 같은 경향은 다른 작품에서도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난다.
이번 제주도에 기증한 장 화백의 작품은 값으로만 따져도 점 당 1억 원을 호가한다니 줄잡아 100억 원이 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기자와 같은 필부의 지극히 세속적인 관심의 영역일 뿐 그의 작품을 돈으로 계량한다는 자체가 작가와 작품을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이번 작품을 기증하는 자리에서 “제주는 나의 삶을 새로 탄생시킨 ‘제2의 고향’이다. 제주에는 전쟁에 지친 영혼을 끌어 안아 주는 따스함이 있었고, 제주에서 마주친 해녀들과 조랑말은 나에게 창작의 샘의 됐다”말했다. 그에게 있어 제주는 제2의 고향이 확실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작품을 기증 받은 제주도는 그가 실향민이고 5년간 제주에 살며 창작활동을 한 적이 있을 뿐 아니라 고령이고 후손이 없음을 감안, 사후 제주도에 안장될 수 있도록 배려하기로 했다.
한 피난 화가의 제주사랑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