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평 황무지에 직접 씨 뿌려 ‘동백숲’ 조성
5000평 황무지에 직접 씨 뿌려 ‘동백숲’ 조성
  • 박수진 기자
  • 승인 201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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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이야기따라
⑫현맹춘 할머니 얼이 깃든 곳 ‘위미중앙로’

위미중학교에서 바다 방면으로 쭉 내려오다 보면 보이는 위미 동백나무 군락.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에 위치한 ‘위미 동백나무 군락’은 도로명주소로 ‘위미중앙로'에 위치했다. 1982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된 동백나무 군락은 제주올레길 5코스에 위치해 있어, 올레꾼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기도 한다. 지난 15일 찾은 이 곳은 매우 시원하고 한산했다. 울창한 동백나무 숲이 더위와 햇볕을 막아주는 것 같았다. 겨울에 왔다면 만개한 동백꽃을 볼 수 있었을 것을…. 아쉬운 마음을 다 잡고 둘러본 동백나무 군락 중간 중간에는 동백꽃 대신 철쭉이 피어있었다. 이 동백나무 숲에는 어떤 이야기가 얽혀있을까.

 

■ 동백씨 구하기 위해 한라산행도 마다않아

17세가 되던 해 위미리에 살고 있던, 군위 오씨 집안의 오용진 할아버지에게 시집 온 현맹춘(1858~1933)할머니. 잠녀였던 할머니는 해초를 캐고 품팔이로 어렵게 모은 돈 35냥으로 황무지 5000평을 사들였다. 할머니는 바다와 가까웠던 이곳에 집에 짓기로 마음먹었지만, 바닷바람으로 인해 집 지붕이 날아갔다고 한다. 방풍림이 필요했던 할머니는 소나무로 바람을 막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소나무는 방풍림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소나무에는 벌레가 들끓었고, 잎이 날카로워 자칫하다가는 큰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안 되겠어. 부드러우면서 바람을 확실히 막아줘야 하는데… 구상나무? 왕벚나무? 동백나무? 뭐가 좋을까.”

당시 구상나무는 한라산 꼭대기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였던 터라 씨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왕벚나무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바람을 막아주는 데는 적절하지는 않다. 할머니는 겨울에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아늑한 집처럼 바람을 막아주는 동백나무야 말로 ‘방품림’용으로 적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동백나무 씨는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5000평이나 되는 황무지를 둘러싸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 위미중학교에서 바다 방면으로 내려오다 보면 위미 동백나무 군락과 마주하게 된다. 위미 동백나무군락은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에 자리잡고 있는 위미중앙로에 위치해 있다.

“그래. 한라산으로 가자.”

할머니는 물질을 마친 뒤 100리 길이 넘는 한라산을 몇 날 며칠을 올라 동백나무 씨앗을 따다가 밭 주위 울타리에 뿌렸다. 할머니는 센 바람을 맞으며 씨를 심지만, 가끔 망아지와 송아지가 새싹을 먹어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마을 장난꾸러기 아이들은 열매가 익기도 전에 마구 따서 흩어 놓거나 꺾어버리기도 했다.

“쯧쯧. 자이 보라. 또 한라산 감쩌. 물질이나 허주 무사 또 씨 따래 감시니.”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를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어느 세월에 싹이 큰 나무가 되겠냐면서 한 마디씩 던지고 가는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매일 물과 거름을 줬다.

10년 정도 지나자 동백나무는 어느 정도 방풍림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됐고, 현재 이곳에는 500그루가 넘는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은 이곳을 ‘버득할망 돔박숲(황무지 할머니 동백숲)’이라고 부르고 있다.

▲ 현맹춘 할머니가 조성한 동백나무.

■ 할머니 이야기 담은 ‘버둑할망 돔박수월’ 발간

지난 2013년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버둑할망 돔박수월’이 발간됐다. ‘버둑’은 황무지, ‘할망’은 할머니, ‘동박수월’은 동백숲이라는 뜻이다.

저자 최정원씨는 “할머니가 동백꽃을 조성했다는 사실 외에 다른 일을 아는 분은 후손 중에도 별로 없었다”면서 “할머니 후손들은 해마다 취재를 오는 사람들에게 매번 똑같은 말을 들려줘야 하는 일을 힘겨워 하고 계셨다”고 밝혔다.

 

 

 

│위미리의 유래│

 

옛이름 ‘쉐미·뛔미·뛔밋개’ 등 다양…170여년 전부터 사람들 거주

 

위미리의 옛 이름은 ‘쉐미’, ‘뛔미’, ‘뛔밋개’ 등 다양하다. 한자로는 우미촌(又尾村) 또는 우미포(又尾浦)로 표기했다. 위미리에는 큰동산·족은동산·쇠동산이 있는데, 쇠동산의 지형은 마치 소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고, 족은동산은 소의 꼬리와 닮아 ‘우미’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현재의 명칭인 위미(爲美)는 ‘우미(又美)’의 우(又)가 위(爲)로 바뀐 것이다.

400여년전쯤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위미리는 170여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1895년에는 ‘전국 23부 지방제도’로 인해 제주부 정의군 서중면 위미리로, 1946년 ‘제주도제’가 실시되면서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면 위미리가 됐다. 그 후 1980년부터 남원면이 남원읍으로 승격되면서 남원읍의 관할을 받았고,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하던 시절 남제주군이 서귀포로 통합되면서 최종적으로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가 됐다.

위미리는 위미1~3리로 구성됐으며, 주요 작물은 감귤이다. 위미리와 인근에 있는 신례리, 하례리 등 3개 마을 주민들은 1939년 ‘위미공립심상소학교(현재 위미초등학교)’를 개교했다. 학교 부지는 위미리가, 학교 건물 건축에 따른 예산은 3개 마을이 함께 충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위미리에는 ‘백통신원 제주리조트 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중국 부동산 투자 기업인 백통신원은 내년까지 2594억원을 투입해 맥주박물관과 세계음식거리 등이 들어선 ‘제주리조트’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한라산 천연보호구역과는 불과 700m 밖에 떨어지지 않아 ‘중산간 난개발’이 우려된다는 논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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