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되는 좌절에도 국립대학으로 승격
거듭되는 좌절에도 국립대학으로 승격
  • 제주타임스
  • 승인 2005.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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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상조란 이유로 종합대학 승격 무산

1955년 4월 6일 4년제 도립대학으로 승격되었으나 제주도의 재정사정 빈약으로 인해 교육시설이 기준 령에 비해 크게 미달된 실정이었다.
대학 측과 제주도 당국에서는 대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국립으로 이관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나라의 형편이 전후복구를 위해 국력을 쏟을 때여서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제2공화국이 탄생을 보게 되면서 국립 이관을 추진하자는 논의가 구체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국립이관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시점은 5·16군사정변후 김영관 해군준장이 제주도지사로 부임해 오면서 제주대학이 국립 이관 필요성을 인정하고 문종철(文鍾哲) 학장과 함께 그 추진에 발 벗고 나서게 되었는데, 실무적인 면은 당시 제주도 학무과장 이었던 양치종(梁致鍾)선생이 적극 도왔다.
당시 군사정부가 내린 지방대학의 합리적 육성이라는 방침에 기대를 걸고 국립실업대학으로 개편해 주도록 하는 건의서를 1961년 7월 13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제출하였던 것이다.

김영관 지사 명의로 된 이 건의서의 주요 골자는 ‘제주도민은 교육열은 높지만 경제사정이 빈약하므로 경비가 많이 드는 육지부 대학으로의 유학은 거이 불가능 한 실정이며, 도립제주대학은 설립자인 제주도가 재정이 빈약하기 때문에 법정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있어, 대학의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으므로 국립으로 이관하여 국가재정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제주도 여건을 감안하여 축산·수산·특용작물에 관한 연구를 주로 하는 실업대학으로 개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립이관에 관한 건의서가 제출된 2일 후인 7월 15일 손창규 문교사회 분과위원장을 제주도로 파견하여 국립이관에 관한 도민이 여론을 파악하는 한편 대학시설을 점검한 후 상경하여 국립 이관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보고서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제출하게 된다.

그리하여 1961년 8월 10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제주대학 국립이관 안건이 상정되고 만장일치로 통과를 보게 되었다.
1962년 3월 1일에 법문학부와 이공학부 등 2개 학부를 둔 국립제주대학으로 변경 인가되었는데, 국립초대 학장에 도립대학당시 학장으로서 국립이관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문종철(文鍾哲)씨가 발령되었다.
1962년도에 국립으로 이관이 된 제주대학은 타 시도에 소재한 국·공립대학교나 사립대학에 비해서 성장 발전 속도가 더디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제주대학은 지방소재 단과대학인데다, 캠퍼스가 제주시와 서귀포 두 지역에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시·도에는 사립 종합대학교는 물론이고 국립종합대학교가 있는데, 유독 제주에서만 국·사립을 막론하고 종합대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이 연간 1천여명씩 다른 지역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 실정이어서  학부모인 제주도민들은 막대한 교육비 부담을 갖게 되었다.

또한 단과대학이기 때문에 시설이 영세하여 원활한 산학협동을 추진하지 못함으로써, 지역사회 개발에도 효율적으로 기여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형편으로 보아 1960년대 후반부터 종합대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1968년 8월 8일 종합대학교 승격을 문교부장관 내도 시 간담회 석상에서 건의 했었으나, 시설의 영세성과 제주도의 학생자원 등 제반여건을 감안 할 때 시기상조라고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아라동 부지매입과 통합 이설공사 추진 

국립제주대학은 도민의 숙원인 종합대학으로의 승격을 위해 70년대 중반 캠퍼스 통합이설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우선적으로 통합캠퍼스 부지확보를 위해 ‘재산 매입 및 매각’ 세부계획을 마련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게 된다.
1차로 목장을 매각하여 그 대금을 국고에 세입 시킬 것을 전제로 하여, 1974년 정부예산에 부지매입비로 우선 1억원을 계상해 주도록 문교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1974년도 본예산에서 부지매입비가 3천만원 밖에 계상되지 않았고 그나마 1974년 1월 14일 대통령 긴급조치에 따라 지급배정이 동결되었기 때문에 부지매입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대학당국은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수산학부와 농학부의 1974년도분 강의실 신축공사를 중단하고, 시설공사비 3천4백만원을 부지매입비로 전용할 것을 승인 받아 7월부터 부지매입에 착수하였다.
부지매입추진위원회는 교직원3인과 이인구(기성회 대표), 김철승(동창회 대표), 현경희 아라동장 및 동민대표로 구성되어 학장실 옆 소회의실에 간판을 걸고 임무를 시작하였는데, 김철승 씨는 상근하면서 부지매입업무를 총괄하였다.
부지매입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1974년말 까지 매입대상면적의 53%인 16만6115평을 협의매수 하고, 제주대학 이전통합사업인정신청서를 제출하여 미 확보된 부분에 대해서는 토지수용법상의 토지수용의 길을 터놓았다.

그 후 협의매수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 결과 1975년 7워까지 3만6111평을 추가로 매입하고, 협의매수에 불응하는 10만4924평에 대해서는 1975년 8월 25일 중앙토지수용위원회의 수용재결을 얻어 공탁금을 불입함으로써, 착공한지 1년 2개월만인 1975년 9월 21일에야 30만7191평에 이르는 부지매입을 완료하였다.
1976년에는 정부예산에 부지 정지비가 5천만원이 계상됨으로써 대학당국은 이전사업별 기본계획(안)을 작성하여 문교부에 승인 요청하고, 11월 1일에는 서울소재 협성공업사와 정지공사 용역계약을 체결함으로서 12월 1일 착공을 보게 되었다.
한편 1977년도 정부예산에는 이설 사업비로 6억9500만원이 반영됨으로서 건축공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2월4일에 농수산학부 시설 설계 용역계약이 체결되고, 3월에는 차관사업으로 이루어지는 교육학부 시설 설계 용역계약이 체결되었다.

4월 25일에는 조달청에 건축공사 계약체결을 의뢰한 결과 8월 8일 통합시설 건축공사가 착공되기에 이르렀고 시공은 서울 소재 (주)삼익주택이 맡았다.
1978년에는 제주대학 통합이설 사업비로 114억원이 책정되어 사업이 활기차게 추진되었고, 6월 2일 제주도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이설현장을 시찰하면서 종합대학 여건을 갖출 수 있도록 모든 공사를 차질 없이 진행하라고 관계자에게 지시했다.
대통령이 특별지시에 따라 진입로 개설 및 각 교육동 시설공사는 물론 교수아파트와 학장공관도 착공되었다.

1979년도에는 정부예산에 통합이설사업비로 40억원을 계상해 주도록 정부당국에 요청했는데 예산안에 33억 1800만원이 계상되고 이것이 국회에서 삭감 없이 통과됨으로서, 본관·도서관·체육관 등 기타건물의 부대공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국립제주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 승격 될 때까지 대학을 이끌어 간 역대학장은 국립초대학장에는 문종철(文鍾哲)선생이 제2, 3대 학장에는 김계용(金繼鏞)선생, 제4대 학장은 변시민(邊時敏)박사, 제5대 학장은 현평효(玄平孝)박사가 역임하였다.
강 선 종(전 탐라대교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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