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 제주매일
  • 승인 2015.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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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혜영 제주도여행작가

한 지인이 어젠 “어버이날 뭐 할 거냐”고 물어왔다. 부모님 뵈러 간다니까 “뵐 부모님 계셔서 복도 참 많다”고 덧붙인다. 그렇다. 그것이 감사함인지 잊고 살 때가 많다. 60이 가까워 오는 나이에 부모님 두 분 다 계신 것만으로도 내게는 복이었음을 미처 몰랐다. 그 동안 내 앞가림만 하느라 정말 가다오다 마음을 보인 것이 부끄러워진다.

여느 자식들처럼 내게 있어 아버지·어머니는 특별하다. 아이 셋을 낳고 키우면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못하고 살아 온 것이 안타깝다. 삶이 힘들수록 부모님은 더 크게 다가와 온기를 더한다. 자식을 믿고 기다려 준다는 것.

올해로 막내가 스물여섯이다. 아이는 태어나면서 의료사고를 당했다. 서울의 큰 병원을 수 없이도 다녔다.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좌절·분노·포기, 그리고는 일어섰다가 다시 좌절·분노…의 사이클이 내 삶속에서 반복됐다.

그런 상황을 지금까지도 부모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괜스레 걱정만 끼칠까 우려가 앞섰다. 딸이 처한 상황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저 기다려 주었다. 15년을 넘게 그 어떤 말씀도 물어 오시지 않으셨다. 아이가 고등학생 됐을 무렵 “학교는 잘 적응하니?”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 물어 오신 말씀이다. 말도 못하고 가슴으로만 아파했을 아버지 어머니 “죄송해요, 이젠 괜찮아요...”

어머니에게는 욕도 매도 기억이 없다. 자식교육은 가방끈으로 하는 게 아님을 어머니에게서 배운다. 어머니 입에서 남을 탓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 아파 누워 계신 모습도 본적이 드물다. 그때마다 어머니를 떠 올려 봤다.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천성이셨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랑이셨다.

팔십 다섯 나이의 어머니는 아직도 성산에서 물질을 하신다. 60년 하던 일이 이제는 전상(典常)이 돼버린 것이다. 바다가 세서 나가지 못하시면 그때서야 아파하신다. 그래서 우리 자식들은 어머니 하시는 대로다. “건강하니까 돌아다닌다”는 말씀을 적극 지원한다. 그 동안 한 발 자욱 물러나 우리를 지켜보아 주셨듯이 이제는 자식들이 아버지 어머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하 실 수 있도록 한 발치 물러나 응원할 것이다.

이제는 딸이 해 드릴 차례다. 어머니께 잘 해주시는 동네 어른들께 뭔가를 나눠드리는 삶을 살고 싶다. 몇 년 전 부터는 김장을 60포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누었다. 지난달에는 마늘 장아찌를 80단 담았다.

어머니도 딸에게서 받는 것을 즐거워하신다. 아니 대견스러움에 자랑스러우신가 보다. 받으신 것보다 더 크게 자랑하고 다니신다. 친정제사 때마다 부르신다. 얼굴 보고 싶어 하심을 안다. 아들딸 덕분에 목에 힘주고 사신다는 말씀도 하신다. 그럴 때 마다 맘껏 힘주시라고 거들어드린다.

어머니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DNA를 딸에게 물려주셨다. 딸은 그 DNA를 그의 딸에게 그대로 물려주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딸에 딸이 딸을 낳아 엊그제 돌을 맞았다. 예쁘고 사랑스럽다. 우리 딸의 할머니처럼 아이를 키워가길 바랄 뿐이다.

어버이날을 맞아 카네이션 만들기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초록 이파리 하나 세우고 빨강·연초록·분홍에 꽃봉오리 하나를 더해 카네이션 하나를 완성했다. 어머니 가슴에 달아 드릴 꽃이라 생각하니 코사지 하나하나가 모두 예뻤다.

글을 쓰는 지금 전화다. 어머니이시다. 날씨가 좋아 바다에 가야하니 다음 날 오시겠다며 “어버이날은 천천히 하자”신다. 얼른 성산포 집에 다녀와야겠다. 탯줄처럼 까맣게 마른 미역 몇 줄 놓고 좌판을 차리셨을 어머니를 뵙고 밥 한 끼 얻어먹고 와야겠다.

참, 어디 누구 안계신가요? 우리 어머니들에게 훌륭한 어머니상 내려 주실 분요. 그렇다면 우리 자식들이 상을 드립시다. 사랑의 상을. “세상의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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