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연극연출가로 살기
제주에서 연극연출가로 살기
  • 정민자
  • 승인 2015.0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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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희곡을 시각화?청각화
연극이라는 집을 짓는 사람
35년 연극인생 첫 연출상 수상

연극 현실은 옛날과 대동소이
제작여건 어렵고 해결책은 요원
그래도 지하극장 모이는 열정

흔히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삶의 내용 모두가 연극적 이야기로 꾸며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꾸미는 사람은 작가고 또 이 이야기를 관객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무대 위에 시각화?청각화해야 한다. 연극의 여러 수단들, 즉 배우?무대장치?조명?분장?의상?도구?음향 등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사람이 연출이다.

나는 그런 일을 하는 연극연출가다. 연기나 연출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배우로 시작해 어느 순간 배우보다 연출 작업을 더 많이 하게 된 유명하지 않은 연출가다. 연출가라고 하면 희곡을 입체화해 숨결을 불어 넣고 질감을 입혀 무대 위에 연극이라는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집은 공연이 끝나면 사라진다. 같은 작품, 같은 배우라도 공연마다 모습과 느낌이 달라지는 것 또한 연극이니 배우든 연출가든 참 공허한 직업인 것 같다.

얼마 전 연출상이란 걸 받았다. 내가 연출한 작품이 최우수상을 받은 것도 몇 년 만이었지만 연극 시작하고 연출상은 처음이다. 어떤 상이든 상은 받는 사람이나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준다. 축하인사를 부끄러울 정도로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게 어디 나 혼자만의 작품인가? 함께 작업한 사람들의 수고가 고스란히 녹아든 거다. 물론 무대는 작품이 어떻게 보이고 들리느냐에 대한 연출가의 생각을 반영한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혼자 궁리하고 분석하고 머릿속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좋아하고 제법 잘 한다고 자부도 하지만 사람을 다루는 것에는 젬병이다.

작품을 만들면서 배우들이나 스태프를 꾸려서 인솔하려다보면 참으로 난감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연출가 자질이 부족하다”는 등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작품을 잘 만들면 되지, 왜 연출가 자질 운운하면서 꼭 사람 다루는 법을 들먹이는지 속상하다”고 변명을 늘어놓게 된다.

너무 어렵다. 게다가 지역의 연출들이 제작까지 겸하는 경우는 작품을 잘 만들어야 하는 책임과 망하면 안 된다는 부담까지 안고 가야하기 때문에 늘 바늘방석이다. 그렇게 35년을 살았다. 이젠 좀 편하게 살고 싶다. 일중독에서 벗어나, 이 일 끝나면 저 일이 기다리는 너무 빡빡한 생활에서 도망치고 싶다. 적당하게 게으름 피우면서 적당한 거짓말로 일도 뺑뺑이 치면서 그런 재미도 찾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나는 내가 잘 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른다. 우연히 시작한 일이 내 평생 직업이 되고 한 우물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연기와 연출이 내 전문, 내 재능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물론 연극작업은 재미있다. 지루할 겨를도 없다. 그런데 혹자는 말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평생 살 수 있으니 누구보다도 행복할 것”이라고. 그런데 그들은 알까? 아이를 낳고 우유 값이 없어 100일도 안 된 딸을 들춰 업고 과외 다녀야 했던 내 심정을. 아기 눕혀놓고 운전을 배우던 나의 지친 모습을.

이제는 연극 환경이 옛날보다 나아졌다고들 한다. 지원금이 많아졌다고. 물론 개선된 면이 있다. 하지만 지원금이 많아졌다고 환경이 나아진 걸까? 여전히 배우가 없어서 작품 고르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후배들을 기껏 키워놓으면 나중엔 서울로 육지로 떠나버리는데….

제주에서 전업예술인으로서 살기가 어떠냐고 묻는 좌담회가 있었다. 그곳에 모인 예술인들은 살 수 없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예술행위를 하기 위해서 대리운전도 하고 인력시장에도 나가고, 기회만 되면 기간제 교사나 방과후 강사도 한다는 분도 있었다.

그건 그래도 나은 편이고 대부분은 알바전선에서 허덕이는 게 현실이다. 내가 처음 연극 시작할 때의 환경이나 35년이 지난 지금이나 제작여건은 여전히 어렵고, 해결책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지금껏 해온 이 예술행위를 버릴 수도 없고, 쉴 수도 없지 않은가. 오늘 저녁에도 우린 지하 극장에 모여 열정을 불태운다. 이 극장에 관객이 가득 찰 그날에, 더 멋진 공연을 보여주고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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