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바람이 싱그러운 계절이다. 가파도 청보리축제가 4월 11일부터 5월 10일까지 한 달간에 걸쳐서 열리고 있다. 주말이 되면 파릇파릇한 아이의 손을 잡고 가파도로 가려는 가족들로 모슬포항 대합실은 인파로 넘쳐난다.
이들이 가파도 평원에서 진초록색으로 물든 청보리밭 오솔길을 가족끼리 다정하게 거니는 모습을 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다. 족히 1~2시간이면 섬 곳곳을 거의 둘러볼 수 있다. 보리밭 한가운데에는 엄청난 크기의 고인돌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이채롭다.
섬은 평평하다. 산이나 오름과 같은 동산도 없다. 사방팔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바닷바람을 피할 수도 없다. 가파도는 제주에서 가장 오래전에 만들어진 조면안산암이 분포하는 곳이며, 바다에 바싹 엎드린 자세로 바닷속에 잠길 것 같은 해안단구 지형의 섬이다.
거석(巨石) 문화의 하나인 선돌이 바닷가에 서있고 주위에 135개나 되는 고인돌 군락은 장관을 이룬다. 고인돌을 만든 2000년 전, 이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생활모습이 흑백 활동사진과 같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이들은 왜 하필 이런 외딴 섬에 청동기 문화로 대표되는 고인돌을 무더기로 만들어 두었을까. 묘표석(墓標石)으로 추정되는 선돌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알려주기 위한 암시일까. 이 곳 가파도에 서면 항상 드는 생각은 이 섬은 아직도 선사인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이상한 외계의 장소라는 느낌이다.
가파도는 제주와 가장 가까운 모슬포 송악산 해안에서 남쪽으로 2.2㎞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유인도다. 비교적 육지에서 근거리에 위치한 편이다. 또한 가파도에서 남쪽으로 4.2㎞ 떨어진 곳에는 우리나라 최남단 섬인 마라도가 있다.
가파도는 면적이 0.84㎢로 제주도 부속도서들 중에서 4번째로 크며 남-북간의 거리가 약 1.4㎞, 동서간의 거리가 약 1.5㎞로서 남북과 동서방향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이며 가오리모양을 하고 있는 섬이다. 섬은 전체적으로 나지막하여 마치 바다에 떠있는 듯한 모습이다.
배를 타고 가파도로 들어갈 때 섬을 보면 지표면은 평평하여 높이 약 10m 정도의 해안단구로만 구성된 섬으로 보인다. 가파도 형성 이후 섬은 전체적으로 빙하성 해수면 상승으로 완전히 해침(海浸)을 받아 자연적인 해안단구가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가파도의 남서부 해안선에는 높이 5-7m의 해안단구 지형이 해안선을 따라 약 700m에 걸쳐 추적된다. 해안선은 모두 조면안산암으로 구성된 암석해안이다.
해안단구(海岸段丘)는 해수면 상승기에 형성된다. 지금부터 약 6000년 전이 해수면 상승기로서 지금보다 해수면이 높았던 시기다. 해안선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패총은 주로 이때 만들어진다.
경상남도 김해시에는 시내에 패총이 위치하고 있다. 당시 해수면 상승기에 김해시내는 해안선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가파도의 해안단구층 위에 고인돌이 놓여 있다. 가파도 하동포구 서쪽편에 선돌과 함께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

고인돌의 암석은 바로 앞 해안선과 같은 종류의 조면안산암으로서 외형적으로도 동일하다. 직경 4~5m, 무게 20~30t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이 고인돌 상석과 꼭 같은 모양의 암석은 과연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고인돌이 맞는 것일까?
우선 자연적으로 이러한 현상을 걸름작용(winnowing)이라고 한다. 곡식을 키질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수천m 깊이의 해저에 망간단괴라고 하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자원인 광물덩어리가 수없이 깔려 있다. 감자와 비슷한 크기의 덩어리가 두꺼운 점토층 위에 마치 자갈밭과 같이 깔려 있다.
해저로 침강하는 먼지와 같은 점토는 미약한 해류에 의해 흔들리는 망간단괴 밑으로 가라앉고 덩어리는 항상 표면에 위치하게 된다. 가파도에서도 이런 작용으로 해안에서 침식하는 해류에 의해 이 엄청난 무게의 고인돌 암석 덩어리를 계속하여 지표에 존재하도록 하는 작용이 가능할 것인가, 궁금하다.
몇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고인돌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에서도 고인돌 아래에서 뚜렷한 무덤 형태의 고인돌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최근 국립제주박물관에서 크레인을 동원하여 고인돌 상석을 들어낸 결과 수십㎝ 두께의 얇은 토양 아래에는 그냥 암반 뿐이었다. 고인돌 상석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가파도 고인돌은 과연 사람이 만든 진짜 고인돌인가, 아니면 자연적인 현상인 것일까. 불과 2000년 전의 일어난 일을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선돌로 표식을 세우며 만들어 놓은 가파도 고인돌 군락에서 당시 선사인들이 우리들에게 남긴 숙제를 푸는 일 또한 내가 가파도를 찾는 이유중의 하나다.
‘가파도’ 마라도와 같은 듯 다른 섬
모슬포에서 남쪽 바다로 일직선 상에 배열된 가파도와 마라도는 해저지형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모슬포와 가파도 사이는 평균 수심이 15m 정도로 매우 얕은 반면, 가파도와 마라도 사이에는 수심이 130m 정도로 매우 깊은 해저 협곡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 주변에 분포되어 있는 부속도서들은 대부분이 가파도와 같이 수심 10여m의 낮은 수심으로 본섬과 연결되어 있으나, 마라도는 가파도와의 사이에 조류(潮流)가 통과하는 깊은 협곡이 존재하고 있어 다른 부속도서들과는 다른 형성과정을 갖고 있는 독립된 화산체로 보인다. 가파도와 마라도 사이의 바다 밑에 존재하고 있는 깊은 협곡은 타원형의 제주도 연안을 따라서 해안선과 평행하게 형성돼 있다.
밀물과 썰물이 하루에 두차례에 걸쳐 반복하며 물길이 형성된다. 조류의 방향은 밀물시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썰물시에는 반대방향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따라서 밀물은 서귀포 앞바다에서 모슬포를 거쳐 한림 앞바다로 흐르고, 썰물은 그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이 거대한 조류의 주된 통로가 이 해저 협곡이 된다. 그래서 가파도와 마라도 사이의 해저 협곡 위에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의 해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가파도의 지질은 조면안산암(trachyandesite)의 용암으로 구성돼 있다. 암석은 연회색을 띠고 있으나 용암류가 공기 중에 노출된 암석 표면에는 핑크색으로 채색돼 있기도 한다. 용암의 상부에는 역암층이 두께 0.5∼1m로 발달돼 있다.
둥근 자갈이 쌓여있는 이 퇴적층은 가파도 조면안산암의 돔(dome)이 주기적인 해침으로 인해 침식되어 상부면이 파식대지와 같이 깎여 편평해진 결과다. 가파도를 구성하고 있는 조면안산암에 대한 절대연대 측정 결과, 약 80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도 화산활동사에서 초기에 해당하는 화산활동의 산물이다. 당시 같은 시기에 생성된 화산체로는 인근 육지에 위치하고 있는 산방산과 월라봉이 있다. 따라서 가파도는 산방산, 월라봉과 같은 시기인 제주도 화산활동 초기에 형성된 독립된 화산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