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죽음으로 재혼 거부한 김천덕 기린 ‘천덕로’

제주에는 죽을 때까지 절개를 지킨 열녀와 관련된 마을이 여러 곳 있다. 제주시 전농로(홍윤애)와 제주시 천덕로(김천덕),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열녀 정씨),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열녀 오씨)등이다. 이 중에서도 이번에 본지가 10번째로 소개할 길은 김천덕의 이름을 딴 ‘천덕로’로, 곽지리와 어음리(약 9.5km)를 잇는다. 천덕로에는 도치돌가 든과 어사촌도야지 등이 자리 잡았다. 천덕로를 지나 도치돌길 등을 따라 차로 15분정도 가다 보면 평화로로 이어진다.
▲과부 됐어도 평생 한 남자만 사랑하다
‘천덕로’는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에 살았던 곽연근과 혼인한 김천덕(金天德)과 관련이 있다. 1510년 즈음에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김천덕은 결혼한 지 20년이 되는 해에 남편을 잃었지만 끝까지 한 남자만을 사랑한 인물이다. 곽지과물해변 입구에도 김천덕을 기리는 ‘열녀 김천덕비’가 세워져 있다.
김천덕의 남편 곽연근은 워낙 배를 잘 다루었다고 한다. 이에 조정은 그의 배 다루는 기술을 인정해 중국에 바칠 진상물을 실고가는 책임자로 임명했다. 중국으로 가던 그는 제주도 북쪽에 위치한 무인도인 ‘관탈섬’주변의 바다에 배가 침몰해 사망했다. 관탈섬 주변 바다는 원래 물결이 매우 세고, 사고가 자주 나는 곳이었다고 한다.

39살에 과부가 된 김천덕은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남편이 혹시나 살아 돌아올까 매일을 기다렸다고 한다. 또한 3년 동안 아침과 저녁으로 음식을 올리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삭망제(朔望祭)와 시제(時祭)때는 관탈섬을 보며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훗날 곽지리로 귀양을 온,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자는 김천덕의 재산이 탐나 유혹을 했다. 평생 남편만 바라본 김천덕은 귀양온 자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았다. 김천덕은 귀양온 자가 관가에 거짓을 고해 곤장 80대를 맞게 되는 위기에 처했다. 김천덕은 겉으로 귀양온 자를 순종하는 척 하면서 관가를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 후 자신의 재산을 탐낸것을 알게 된 김천덕은 귀양 온 자에게 옷 한 벌과 소 한 마리, 무명 30필을 줬다고 한다.
또한 여수(旅帥, 조선시대 군대 조직인 여의 지휘관)로 있던 자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김천덕의 아버지 김청(金淸)을 꾀어낸 후, 몰래 아내로 삼으려 했다. 김천덕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결혼하기 전날에야 알았다고 한다. 김천덕은 대성통곡을 하며 자기 집에 불을 질렀고, 이튿날 아침에 스스로 목을 매기에 이른다.
다행히도 김천덕과 곽연근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황급히 구출해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김천덕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헌옷을 입어 미친 척을 하면서 죽음으로 재혼을 단념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 이상 김천덕의 아버지도 강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천덕은 효심도 지극했다고 한다. 김천덕의 아버지가 80세가 되던 해 병으로 앓아 누으니,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밤낮으로 간호했다.

이런 얘기는 조선 중기 시인 겸 문신이었던 백호 임제(白湖林悌)로부터 널리 퍼지게 됐다. 임제는 자신이 문과에 급제한 사실을 제주목사로 재임 중인 아버지 임진에게 알리려 제주에 왔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탄해 ‘김천덕전’을 지었다고 한다.
다음은 백호 임제가 쓴 김천덕전 중 일부다.
“천덕은 남쪽 변방의 한 여자일 뿐이다. 농사일을 하고 있으니 처음부터 여자가 지켜야 할 규범은 없었을 것이다. 한 마음으로 남편을 섬기고 지조가 두드러지니 평범한 사람과 비교할만한 것이 아니다.(중략)”
선종 10년인 1577년에 세워진 김천덕비는 곽금초등학교와 곽지어린이집, 곽지리사무소 등을 지나 2009년 곽지과물해변으로 옮겨졌다.
▲곽지리 유래
과오름 아래 쌓인 ‘대성’ 성냥갑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곽지리에 따르면 2000년전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곽지리는 원래 곽기리가 불렸다가,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곽지리로 통용됐다. 곽지리는 곽지 과오름 아래쪽에 쌓은 대성(大成)이 성냥갑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곽지사람들은 큰오름과 샛오름, 말젯오름 등 세봉우리로 형성된 아름다운 과오름이 있었기에(일명 곽악삼태, 郭岳三台) 순하고 악을 모르며 선비기질을 타고 났다고 한다.
일제는 곽오름의 빼어난 지질학적 형상 때문에 큰 인물이 나올 것이라고 판단, 삼태의 맥을 끊을 목적으로 심장부에 속하는 샛오름을 파헤쳤다고 한다. 일제는 샛오름을 파헤친것도 모자라 이 곳을 공동묘지로 만들었다. 현재 400여가구에 10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곽지리의 주산물로는 양배추와 브로콜리 등이다. 곽지리는 브로콜리를 이용한 축제를 매해 7~8월쯤 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