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완종 리스트’ 정치권 강타
전·현직 핵심 實勢 대거 연루
박근혜 정부 최대 위기 봉착
聖域 없는 수사 천명한 검찰
‘생즉사 사즉생’ 정신 없이는
현재의 난관 결코 못 벗어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지난 8일 기자회견을 열고 결백을 주장했을 때 사람들 사이에선 ‘역린(逆鱗)’을 건드렸다는 말이 나왔다. 용(龍)의 턱 밑에 거슬러 난 비늘, 즉 ‘임금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성씨는 이날 “2007년 당시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대선 후보 경선 때 허태열 전 의원 소개로 박근혜 후보를 만났으며, 그 뒤 박 후보 당선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고 밝혔다. 박근혜 정부의 아킬레스건을 겨냥한 ‘도발’이었다. 검찰을 향해선 자신에게서 자원외교 관련 비리 혐의를 찾아내지 못하자 분식회계와 횡령 등 별건 수사를 통해 압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영장실질심사가 있던 9일 성씨가 법원이 아닌 북한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가 발견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一波萬波)로 번졌다.
그 메모지엔 허태열(7억)·김기춘(10만달러)·홍준표(1억)·부산시장(서병수 추정, 2억)·홍문종(2억)·유정복(3억)·이병기·이완구 등의 이름과 함께 돈 액수가 적혀 있었다. 이들이 누군가. 홍준표 경남지사를 제외하면 자타가 공인하는 박근혜 정권의 전·현직 핵심 실세(實勢)들이다. 돈을 주고받은 진위(眞僞) 여부와는 관계없이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는 말이 터져 나온 이유다.
죽은 성완종이 ‘살아있는 권력(權力)’과 정치권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모든 이슈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성완종 리스트’로 정치권은 숨을 죽인 상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여권과 야권 모두 바짝 얼어 붙었다. 역대 정권을 넘나들며 정·관계 및 재계에 폭넓은 인맥을 형성했던 성씨의 과거 행적 때문이다. 그는 참여정부 시절 두 번이나 특별사면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지금 사시나무 떨 듯이 조바심과 초조함을 드러내고 있는 곳은 역시 여권(與圈)이다. 이미 정부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데다 자칫 정권의 레임덕으로 직결될 수도 있는 메가톤급 폭발력과 파괴력을 ‘성완종 리스트’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리스트에 이름이 거명된 당사자들은 펄쩍 뛰며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황당무계한 소설(김기춘)’이라거나 ‘상상 속의 이야기일 뿐(허태열)’ 등 해명도 여러 가지다. 문제는 이 같은 이들의 주장이, (설혹 사실이라 쳐도) 국민들에게 씨알도 안 먹히고 있다는 점이다.
검찰이 12일 특별수사팀을 구성해 ‘성완종 리스트’ 수사에 적극 나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검찰은 이날 “한 점의 의혹도 남기지 않겠다”며 성역(聖域) 없는 수사를 천명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법과 원칙에 따라 성역 없이 엄정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스트 파문이 터진 이후 박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입장을 표명한 것은 처음이다. 이번 사태에 대한 정면 돌파의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현재 검찰의 ‘칼끝’이 어느 선까지 향할 지는 미지수다. 일각에선 성완종 전 회장이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밝힌 ‘대선자금’ 내용을 전제로 2012년 대통령 선거자금 수사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각종 설만 무성한 가운데 관건(關鍵)은 검찰의 수사 의지다. 김무성 대표가 “검찰 수사에 외압(外壓)이 없도록 새누리당이 앞장 서 책임지겠다”고 밝혔지만 수사가 정권의 입김에서 자유로울지는 의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검찰 수사가 흐지부지될 경우 검찰 조직은 물론 박근혜 정부 또한 국민들의 불신으로 인해 존립 근거를 상실할 것임은 뻔하다.
박근혜 정부나 검찰로선 이번 수사가 위기이자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고자 한다면 사는’ 바로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의 정신이다. 이런 결단이 없다면 작금의 난관을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악(惡)이 빠져나간 판도라의 상자에는 ‘희망(希望)’이 남았다고 그리스 신화는 전한다. 향후 검찰의 수사가 ‘헛된 희망’으로 전락할지, ‘한줄기 희망의 빛’이 될런지는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