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진보와 보수, 勞使 등 벽 허물고
‘화해·상생·통합의 길’ 나아가야
‘아전인수’ 대신 ‘易地思之’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포용을
“푸른 숲이 되려거든 함께 서라”
“지금 당신은 자신이 ‘보수(保守)’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과는 달리 ‘진보’에 가까운 사람들도 동등한 권리를 가진 국민임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자신이 ‘진보(進步)’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보수’에 가까운 사람들도 같은 민족이고, 하느님은 그들을 위해 매일 해를 비추고 비를 내려주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제주교구장인 강우일 주교가 지난 5일 부활대축일에 발표한 ‘사목서한(司牧書翰)’ 중 일부다. 강 주교는 이날 “진보와 보수 등 모두가 적의(敵意)와 대결의 갑옷을 벗어야 한다”며 우리 사회의 ‘화해와 상생, 그리고 통합’을 역설했다.
강 주교의 고언(苦言)은 계속 이어진다. “평생 피땀 흘려 모은 재산으로 회사를 일구셨습니까? 어떠한 기업도 수많은 노동자의 피와 땀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고, 노동은 자본에 우선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노동자는 경영자가 마구 부리는 종이 아니라 경영의 동반자입니다”
“당신은 박봉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노동자이십니까? 노동의 대가는 금전만이 아니라 이마에 땀 흘려 일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소중한 선물입니다. 경영자는 척결해야 할 적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노사의 동반자적(同伴者的) 관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목서한’은 감목(監牧·교구장)이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다. 다른 한편으론 교파나 종교를 초월해서 우리 사회에 고하는 외침이기도 하다.
강우일 주교는 “우리나라의 경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러면서 끊임없는 경쟁을 통한 탈락과 선발의 사회가 젊은이들을 일자리에서 몰아내고 노인을 외톨이로 내몰고 있다며 우리 사회의 무한경쟁(無限競爭) 구조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를 요약하면 청년 일자리와 노인 문제, 노동자와 경영자의 분열과 대립 등을 놔두고서는 사회발전과 통합(統合)을 이룰 수 없다는 것. 이른바 죽음의 문화를 걷어내고 생명의 잔치를 벌이려면 진보나 보수를 위시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모든 종류의 적의와 대결의 갑옷부터 벗어던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번 사목서한을 접하며 문득 떠오른 게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였다. ‘처지를 바꾸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뜻을 지닌 이 말은 맹자(孟子) 제8편에 나오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에서 유래됐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현실 속의 우리는 ‘역지사지’보다 오히려 ‘아전인수(我田引水)’에 가깝다. 정치권에선 여당과 야당이 ‘자기 논에만 물을 대려는’ 식으로 서로 으르렁대기 일쑤다. 노사(勞使)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나와 내 집단의 이익이 우선이지,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기 보다는 팽배한 자기중심적 사고가 그 원인이다.
우리 주변의 경우만 살펴봐도 그렇다. 제주4·3을 바라보는 눈이, 강정 해군기지 문제를 대하는 시각이, 관점에 따라 정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지금과 같은 첨예한 갈등과 대립은 처음부터 공고히 형성된 건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보다는 조그만 불신들이 켜켜이 쌓여 우리가 채 모르는 사이 화석(化石)처럼 굳어진 것이다.
그러나 수 십년의 갈등과 대립을 화해(和解)와 상생(相生)의 정신으로 풀어 극복한 사례도 있다. 긴 세월을 반목하며 지내왔던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가 그 주인공으로, 양측 모두 상대방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졌기에 ‘역사적(歷史的) 화해’가 가능했다.
강우일 주교의 말처럼 현재의 갈등과 분열 등을 그대로 두고선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제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는 진정으로 용기있는 성찰(省察)과 고백(告白)이 필요하다.
인디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빨리 가려거든 혼자 가고, 멀리 가려거든 함께 가라. 외나무가 되려거든 혼자 서고, 푸른 숲이 되려거든 함께 서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게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로부터 빌려온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