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민중의 소망을 좇아 국민 경제의 내용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경제 성장이라는 이름 밑에 백성이 가난하게 살게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경제 성장이나 발전은 민중의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강의 기적, 그 뒤편에는 또 하나의 진실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 시절에 민중과 민족을 이야기한 사람,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온 지식인, 평생을 변절하지 않고 동지들을 배반하지 않았던 박현채(1932∼1995).
분단시대를 가장 치열하게 산 사람, 그는 민족경제론을 주창하고,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성장보다 분배를, 종속보다 자립을, 대기업보다 노동자 농민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속의 소년 빨치산 조원제의 실제인물이기도 하다.
“산을 보는 데 있어서 산을 그 자체로서 인식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그것도 인간 간의 사회적 관계 위에서 자기를 규정받고 있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인식되어야 한다.”
산을 향한 그의 뚜렷한 인식이다. 지배계급에게 산은 명당자리로 인식 될 수 있으나,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처절한 삶의 터전이다.
압박과 수탈에서 벗어나려는 인민들의 살림터이자 은신처 또는 억압에 대항하는 거점이 바로 산이다.
산은 민중적 삶에 있어서는 어머니이고 아버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한국 자생적 사회과학의 대부 박현채.
가장 민중적인 것은 가장 민족적이고, 가장 민족적인 것은 가장 민중적이다.
그는 평생을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과 조국의 분단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는 자립적 민족 경제의 건설을 변혁운동의 과제로 삼고 이를 사회구조의 혁명이론으로 연결시켰다.
그는 생전에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 민중·민주 운동의 중심에 있었으며, 그의 사상은 수십 년 동안 축적된 문제의식이 그를 통해 집약되었다.
당시 민족경제나 민족자본이란 말만 꺼내면 ‘빨갱이’ 취급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의 논리는 양적인 성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성장이 삶의 질을 향상시켰느냐고 묻는데서 시작한다.
‘2만 달러 시대 달성’그 자체보다 2만 달러를 손에 들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그의 고통받는 자에 대한 애정은 이 시대에도 분명히 의미가 있다.
2005년은 그의 10주기를 맞는 해이다.
오는 11월쯤 심포지엄과 함께 그의 전집이 발간된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의 저작물은 단행본 12권을 비롯해 모두 400권에 이른다.
특히 그는 정윤형과 함께, 정치비판 및 민족경제론 연구의 학문적 동반자로 활동하였다.
아시다시피 정윤형은 살아생전에 대학교수로,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소장과 4.3연구소 이사장을 엮임 했던 제주출신 학자가 아닌가.
두 사람은 아주 절친한 사이로, 정윤형의 학문적 연구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심화 발전시키데 집중되어 있었다.
김 관 후<북제주문화원 사무국장>